[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61) 도굴 당한 6세기 신라 금관
입력 2011-03-27 18:00
경북 영주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땅이었으나 신라 5대 왕인 파사왕(재위 80∼112)이 공략해 신라의 영토가 되었답니다. 소백산맥을 따라 지형을 이루는 이곳에는 순흥면 태장리 신라 고분 어숙묘(사적 238호)와 읍내리 벽화고분(사적 313호) 등 문화유적이 즐비하지요. 지역 명칭은 내이군, 내령군, 강주, 순안현, 영천 등으로 개칭되다 1914년 영주군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최근 영주에서 금동관과 금동제 대금구(혁대) 및 금동 귀걸이 등 다양한 유물을 함께 묻은 대형 신라 고분이 발굴돼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세종문화재연구원(원장 김창억)이 영주 풍기∼단산 지방도 확·포장공사 1구간에 위치한 순흥면 태장리 216의 2번지 일대에서 삼국시대 석실묘 4기를 확인했거든요.
1호분에서는 출(出)자형 금동관과 금동제 대금구 파편, 금동 귀걸이, 철 도자기, 받침이 달린 목 긴 항아리 등이 나왔고, 2호분에서는 철로 만든 낫의 파편 등이 출토됐습니다. 3호분에서는 금동 귀걸이 2점과 도자기 1점이 수습됐으며, 4호분에서는 특기할 만한 유물이 없는 상태였답니다. 이들 유물은 읍내리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형태랍니다.
1호분은 석실(石室) 내부 규모가 동서 길이 8m70㎝에 남북 폭 2m30㎝로 이 지역에서 확인한 신라시대 고분 가운데 최대 크기라고 합니다. 석실 서쪽 벽면에 외부로 통하는 문을 마련한 이른바 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인 1호분은 처음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매장한 후에도 서너 차례 몇 사람을 더 묻은 이른바 추가장(追加葬) 형식의 무덤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진성섭 조사연구실장에 따르면 동서로 긴 축(長軸)을 마련한 석실 내부에 처음에는 맨 동쪽에 시신을 매장했다가 그 서쪽으로 가면서 추가로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머리 방향은 북쪽으로 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을 만든 시기는 500년 무렵(6세기) 신라시대이고, 부장품을 통해 이곳에 묻힌 사람은 순흥 지역 최고위층으로 짐작되지요.
이번 유물 발굴은 묻힌 사람의 사회적 위계와 성격은 물론이고 당시 고구려와 맞닿은 신라의 변경지역이라는 점에서 순흥의 지리적·전략적 중요성과 위치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하지요. 하지만 1호분 석실에서 발견된 금동관과 금동제 대금구 등 유물은 대부분 극심한 도굴 탓에 파편 형태로만 수습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무덤의 입구로 확인된 서쪽 벽면 최상단 일부가 U자형으로 유실된 것은 도굴 흔적이 분명하고, 이로 인해 유물이 손실되거나 파손 또는 교란된 것이랍니다. 발굴단은 발굴 시기와 모양이 비슷한 경주 천마총 출토 금동관을 토대로 이번에 발굴한 파편을 배치해 금동관 모형(사진)을 재현했습니다. 온전한 형태의 신라 금관을 볼 수는 없지만 이것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요.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