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3-27 20:09
(39) 유다, 유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많다. 유다에 대한 기록도 그중 하나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데 예수를 판 가룟 지방 출신 유다 말이다. 성경은 유다가 예수를 돈 받고 팔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왜 팔았는지, 무슨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었는지, 자세한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그 부분을 소설가들이 추리하고 상상했다. 행간을 읽는 작업이다. 어떤 작가는 성서 시대의 배경을 파고들고 신학적인 해석을 연구하면서 상당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유다의 상황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창작이 아니라 연구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도 없지 않다.
많은 사람이 유다의 고뇌를 추적했다. 단순하게 돈이 탐났다면 마태복음 26장 15절처럼 겨우 은 30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당한 논리를 근거로 말이다. 이런 방향의 유다 재구성에서 공통으로 담기는 내용이 이렇다. 우선, 유다는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민족을 독립시키려는 독립운동가라는 것이다. 예수란 존재를 알면서 유다는 이 사람이 민족의 독립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모을 만큼 능력이 있고 리더십도 출중하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적인 능력은 참 중요한 점이었다. 그래서 유다도 예수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막판으로 가면서 유다는 스승의 길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걸 느꼈다. 이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 유다였다.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배웠고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면서 유다의 고뇌는 깊어진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유다의 눈에는 스승이 걸어가는 길이 분명하게 보였다. 적어도 유다 민족의 독립과 부흥은 아니었다. 그보다 높았다. 한 민족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이 스승의 마음에 있었다.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길이었다. 유다는 갈등한다. 예수의 길을 계속 따라갈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유다는 스승이 걸어가는 길을 틀어보기로 결심한다. 예수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면 스승이 신적 능력을 발동해서 유다 민족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자 여기까지다. 유다의 재구성에서 흔히 등장하는 독립운동가 유다의 상황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기록되지 않은 행간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지 않은 상상은 소설인 것이고.
모스크바에 갔을 때 박물관에서 그림 하나를 보았다. 200년 정도 전 작품으로 기억된다. 화폭 전체가 밤이다. 오른쪽 조금 위에 어떤 집 문이 삼분지 일쯤 열려 있고 그 집에서 빛이 밖으로 비친다. 왼쪽에는 조금 전 그 집에서 나온 사람이 문 쪽을 돌아보고 있다. 몸은 집과 반대 방향인 채 자세만 조금 돌리고 얼굴을 돌려 빛이 나오는 문을 바라보고 있다. 가룟 유다다.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에서 조금 전에 나왔다. 대제사장들에게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고뇌하고 있다. ‘다시 들어갈까, 내 계획대로 실행할까, 예수의 길이 맞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신학자 선배가 언젠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을 논하면서 유다의 모습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연결시켜 말한 게 생각났다. 한국교회는 저녁식사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유다, 유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