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 박정범 감독… 탈북자 후배의 유언, 명작을 낳았다
입력 2011-03-25 18:03
지난해 ‘울지마 톤즈’에 이어 ‘혜화, 동’, ‘파수꾼’ 등의 성공으로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으로 개봉 전부터 관심을 모으는 또 한 편의 독립영화 ‘무산일기’의 주연과 연출을 맡은 박정범(35) 감독을 만났다.
그의 첫 장편 ‘무산일기’는 전작인 단편 ‘125 전승철’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전승철’은 박 감독의 대학시절 후배를 모델로 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로 시작하는 탈북자 전승철이 힘들게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모습, 낯선 자들에게 각박한 서울의 풍경, 순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인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현실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짙은 회색의 우울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승철이랑은 막노동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던 사이였어요. 대학 졸업하고 난 후 영화한답시고 백수였던 시절에 승철이도 같이 영화를 하겠다고 따라다니고…. 2003∼4년엔 영화제가 열리는 전주 부산 등지를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그런데 후배는 3년 전 죽었다. 박 감독이 이창동 감독 영화 ‘시’의 조감독이었던 시절이다. 암이 뒤늦게 발견됐는데 말기였다고 한다. 후배는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인 2008년 8월 ‘형은 꼭 장편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쪽지를 인터넷으로 보냈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 다음해 2∼4월 사이에 박 감독은 ‘무산일기’ 촬영을 끝냈다. 다음 이야기는 알려진 대로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마라케쉬국제영화제, 도빌아시안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은 (제가) 과대평가돼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외국에서 관심을 많이 갖는) 탈북자 이야기고, 주인공 모델은 죽었고…. 그냥 가난한 소시민들의 얘기였다면 이 정도 반향을 일으켰을까 싶어요. 저는 이창동 감독님의 ‘시’를 봤기 때문에, 아직 멀었다는 걸 알죠.” 그는 “영화제에서 상 타는 순간 우울해진다. 그 친구는 죽었는데 나는 칭찬을 받고, 가짜같은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주연을 겸한 배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후배의 경험담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 직접 후배로 분했다. “영화에서 승철이가 맞는 장면이 진짜로 (제가) 다 맞은 거거든요. 남한테 맞아달라고 하기가 그렇잖아요. 승철이에 대해서 (배우에게) 말로 전달하기가 쉽지도 않았고요.” 성실하고 소심하고 착하고, 그래서 무시당하는 사회의 이방인 전승철은 투박하고 담백한 감독의 연기로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또 다른 주연 강은진과 진용욱은 오디션을 통해 발탁했다. 탈북자 전승철을 담당하는 형사 역은 박 감독의 아버지가 맡았다. “아버지가 연기를 잘해서 썼다기보다는 제가 늘 보는 아버지 이미지가 형사와 맞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일엔 관심이 없다고 박 감독은 말한다. “‘시’ 같은 영화도 관객이 안 들었는데, 그보다 훨씬 못한 제 영화야….” 라고 했다. 박 감독의 다음 작품은 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생의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에게 느꼈던 죄책감이 작품을 구상하게 했다고. 함께 청춘을 보냈던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의 영화 밑바닥에 깔린 영양분일지도 모른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