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이재무 ‘경쾌한 여행’

입력 2011-03-25 18:17


이재무(53) 시인의 집은 서울 여의도에 있다. 영등포에 살다가 이사 온 지 5년째다. 여의도에 산다고 하면 초면인 사람은 십중팔구 이렇게 말한다. “좋은데 사시는군요.” 이는 내심 “시 써서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는 거요?”라는 말의 줄임이다. 그 말을 듣는 시인의 뇌리를 스쳐가는 건 ‘오해를 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양자택일이다.

“속내 들킨 이의 발개진 얼굴,/서리 맞은 배추 잎같이 시들어가는 목소리로/아, 예, 전세인데요/그러면 그는 그런다 겸연쩍다는 듯/전세라도 어딘데요? 여의도잖아요/마음의 평지에 불끈 돌 솟아오른다”(‘첫 인사’ 일부)

‘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은 그가 여의도로 이사 와서 쓴 시들을 모은 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게 이사이듯 이번 시집은 그가 중년이라는 나이로 훌쩍 이사 온 후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 앞 수령 50년 오동나무/저 굵은 줄기와 가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성진 가락과 음표 들 살고 있을까/(중략)/동갑내기인 그가 나는 왜 까닭 없이 어렵고 두려운가”(‘말 없는 나무의 말’ 부분)

그는 아파트 앞 오동나무를 보며 오래 전 충남 부여의 고향집 토방에서 식구들 몰래 울음을 삼키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바깥에서 생활에 지고 돌아온 저녁 그가 또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라고 시구를 이어간다. 가족 몰래 울음을 삼키던 아버지의 나이에 이른 그 역시 철들자 올라온 서울에서 얼마나 많은 생활의 패배를 겪었던가. 물려받은 재산은커녕 남에게 지는 법만 배운 세월이 그의 등짝에도 새겨져 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패배인지를 오동나무에게 털어놓고 있다. 그래서 구성진 가락과 음표들이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동갑내기 오동나무인 것이다.

그는 인생의 길흉화복을 겪을 만큼 겪은 중년의 삶에 대해 노래 부른다. “늦은 아침 기척에 놀라 두근거리는 울퉁불퉁한 산길 아내와 내외하지 않고 오른다/(중략)/그 사이 아내에게는 쉽게 감동하는 버릇이 생기고 웃음도 많이 헤퍼졌다/열심히 사는 것과 안달하는 것은 다르다 안달을 배웅하고 난 뒤 자연에 자주 마중 나가는 아내의 몸에서 산더덕 내가 훅, 끼쳐왔다”(‘백둔정방 요양원에서’ 일부)

병에 걸린 아내를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혼자서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순애보가 자신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중년의 삶이 맞이한 화학적 변화다. 중년 이후 삶의 형식을 스스로에게 묻고 그 배후를 엿보는 일은 등교하는 아들의 바지를 다림질하면서도 계속된다.

“일요일 밤 교복을 다린다/아들이 살아낼 일주일 분의 주름/만들며 새삼 생각한다/다림질이 내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을/어제의 주름이 죽고 새로운 주름이 태어난다”(‘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부분)

동시에 그의 시편들은 거개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생활엔 표정과 애환과 기복과 푸념이 함께 있고 무엇보다도 생활은 역동적이다. 생활에 기댄다는 것은 역동에 기댄다는 것이 된다. 그 역동의 표정에 웃음이 있다.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자꾸 웃음이 나온다/밥 먹으면서 풉풉 길 걸으며 낄낄/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중략)//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중략//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우리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생활의 배후가 ‘엉엉 웃는다’는 시구에 함축되어 있다. ‘엉엉 웃는다’는 말에 자조가 섞어있을지언정 이는 결코 생활에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생활로의 경쾌한 유랑을 위해 다시 일어서고 있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난다/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경쾌한 유랑’ 부분)

이재무는 삶이란 흔들리면서 가는 역설과 역동의 맥락임을 이번 시집을 통해 들려준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