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지은 집은 살아서 말을 건넨다… ‘집을, 순례하다’
입력 2011-03-24 17:58
집을, 순례하다/나카무라 요시후미/사이
서울의 대표적 관광명소 인사동 안에는 다른 ‘인사동’이 있다. 지하 2층, 지상 4층에 ‘ㄷ’자 모양을 취한 쌈지길은 현대적인 멋을 살리면서 인사동 특유의 한국적인 정취를 잃지 않은 모양새 때문에 ‘인사동 안의 인사동’으로 불린다. 쌈지길을 설계한 최문규 연대 건축공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 건물은 골목길이 매력적인 인사동의 특성을 그대로 살렸다. 건물의 지하에서부터 4층까지 길처럼 이어지는 복도를 걷다보면 골목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점포들이 불을 밝혀 건물 전체가 은은한 빛을 내뿜는 저녁에는 노란 빛으로 물든 전통 한옥을 연상시킨다.
쌈지길의 설계 의미를 알고 건물을 들여다보면, 특이한 외관의 이 쇼핑몰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술품으로 전환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바닥 타일에 감탄하게 되고, 건물 가운데 전시공간으로 쓰이는 ‘마당’을 보면서 한옥에서 느끼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등 건축을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집을, 순례하다’는 일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세계 건축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여행기다.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상인 ‘요시오카상’ ‘요시다 이소야상’을 수상한 저자는 건축의 역사와 건축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들려주면서 독자를 건축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에 등장하는 8명의 건축 거장들 중에 독자에게 가장 친숙한 이는 강남교보타워와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고미술관’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1943∼)다. 그의 대표작은 스위스 티치노 지방의 전통민가 모습을 본 딴 ‘리고르네토’다. 붉은 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가로 줄무늬가 인상적인 이 집은 티치노 지방의 주변 집들과 조화를 이룬다.
집의 접근로는 특이하다. 잔디 사이를 파헤친 듯이 나있는 좁은 길로, 입구에서 건물까지 비스듬하게 뻗어있다. 왜 정면으로 길이 나지 않았을까. 직접 그 길을 걸어본 저자는 비스듬하게 뻗은 접근로를 걷다보니 건물이 입체적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건축 원리에도 “건물은 정면으로부터 접근하지 말고 비스듬히 접근하라”고 하지 않는가. 방문객들이 자신의 집을 감상하길 바랐던 마리오 보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는 스위스 레만 호숫가 부근에 지은 ‘작은 집’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을 담았다. 원래 이 건축물은 르 코르뷔지에가 “집은 거주하기 위한 기계”라는 건축 철학에 따라 가장 필요한 공간만을 남겨 ‘작은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6년간 살아서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 빼는 도랑에 비누받이를 설치하고, 세탁물이 흐르는 공간 사이에 고정선반을 설치하는 등 집안 구석구석에서 어머니를 배려한 배치가 돋보인다. 피아노 위에 놓인 회전 이동식 조명기구는 르 코르뷔지에가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에게 “이 정보면 악보가 잘 보이냐”고 묻는 듯하다.
책에는 건축물 사진과 설계도가 잔뜩 실려 있어, 글을 읽으며 해당 건물을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특히 빼어난 외관을 뽐내는 건축물을 보면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서 직접 보고 싶은 충동까지 생긴다. 대표적인 게 폭포 한 가운데 위치한 ‘낙수장’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미국 펜실베니아주 베어런 강 한가운데 설계한 집이다. 이혼과 재혼, 간통으로 부침을 거듭하던 ‘비운의 건축가’는 60대에 이 건물을 지어 올리면서 세기의 건축가로 역사에 기록된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포 사이에 커다란 차양을 드리운 채 웅장하게 서있는 집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또한 수평으로 뻗은 강과 수직으로 내리치는 폭포 등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건축물에 수평과 수직의 아름다움을 살린 기술에도 감탄하게 된다.
저자와 함께한 건축 여행은 건물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교훈을 일깨운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주변을 둘러보자. 무심하게 서있는 건물이 사연을 지닌 생물로 느껴지지 않을까.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