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달린다 고로 희열한다… ‘러닝-한 편의 세계사’
입력 2011-03-24 17:37
러닝-한 편의 세계사/토르 고타스/책세상
1970년 미국에서는 한때 이런 이야기가 유행했다. 어느 날 한 회사원이 우울한 상태로 퇴근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지만 자살은 가족에게 불행과 오명을 안겨줄 것이므로 죽을 때까지 달리기로 생각을 바꿨다. 중년인데다 과체중에 골초였기 때문에 달리면 심장마비로 죽을 것으로 여겼다. 남자는 최대한 빨리 달렸다. 다른 사람 눈에는 느릿느릿 달리면서 무섭게 숨을 헐떡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남자가 기대했던 심장마비는 일어나지 않았다. 준비가 부족했다고 생각한 그는 그날 저녁 좀 더 일찍 자고 음식을 덜 먹었다.
이튿날은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오래 뛰면 이번에는 반드시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의 숨을 멎을 지경이 되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팔팔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우울한 기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기운이 샘솟았다. 그는 생각했다. ‘달리기를 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군. 달리기가 나를 치유해주는 건 아닐까?’
‘달리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 나왔다. ‘달리기’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시대순에 맞춰 인문적 교양과 철학, 스포츠, 과학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정리한 탓에 책은 인류의 역사를 통찰한 문화역사서로도 손색없다. 저자는 노르웨이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토르 고타스(46). 주로 현대사회의 아웃사이더와 대중문화를 역사적 관점에서 탐구해온 학자로 스키와 달리기 분야에서의 학문적 역량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을 얻고 있다.
32장으로 구성된 책은 역사적 사실과 신화, 전설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풍부한 사례와 명쾌한 문장으로 달리기와 인류의 관계를 정밀하게 엮어낸다. 권좌를 지키기 위해 달려야 했던 고대 이집트 파라오나 매력적인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팩, 인종을 초월해 사랑을 받은 제시 오언스, 나이키 브랜드의 탄생 비화, 도핑으로 몰락한 단거리 여왕 매리언 존스까지 달리기와 관련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740여쪽에 걸쳐 펼쳐진다.
“람세스 2세(기원전 1303∼1213년)는 기원전 1278년부터 66년 동안 이집트 파라오의 권좌를 지켰다. 대관식에 앞서 그는 피라미드 앞에서 자신이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150야드(약 137미터)의 트랙을 달려야 했다. 30년 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생명력과 통치 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같은 거리를 달려야 했다. 그때부터 3∼4년마다 한 번씩 그는 피라미드 아래서 개최되는 추수 감사 축제에 나가 달려야 했고, 그런 검증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46쪽)
저자는 잉카와 수메르,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최근의 피 튀기는 단거리 기록 전쟁까지 인간의 두 다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을 생생히 기록한다. 수 천 년에 걸쳐 펼쳐진 달리기 역사의 이면에 담긴 인간의 희열이나 욕망 등을 포착하고, 달리기에 담긴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의미들도 끄집어낸다. 그는 특히 달리기와 관련한 논문과 철학서 등은 물론 전문잡지에 실린 독자투고까지 섭렵하고 이를 책 곳곳에서 인용했는데, 달리기에 ‘꽂힌’ 저자의 탐구력과 호기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미국 달리기 관련 잡지들은 조깅을 하며 희열을 경험한 많은 독자들의 투고를 받았다. 1970년대 크레이그 완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나는 우주에서 오는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내 인생의 낙관적인 전망을 느꼈다. 나는 우주의 아이였다. 가는 땅을 박차고 서 있는 내 다리를 내려다보았고, 나의 폐를 채우고 있는 신선한 여름 공기를 느꼈다. 희열은 감정은 아마도 30초는 계속되었던 것 같다. 눈물이 마르자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 영혼은 이 짧은 경험으로 한없이 풍요로워졌다.’”(509∼510쪽)
원서는 2008년 노르웨이어로 출간된 뒤 스웨덴, 미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등에서 번역 소개됐다. 이번에 국내 출간된 책은 영어 번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석기용 서강대 철학과 대우교수는 역자의 말에서 “전 세계에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를 보유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달리기의 세계사를 다룬 이 책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되지 않아 아쉽다”고 적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가급적 전 세계를 아우르고자 노력했지만 이 책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한 유럽인에 의해 작성된 만큼 나의 선호와 공감이 배어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달려야 했던 우리 민족의 영웅 손기정 선수의 이야기가 빠진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불굴의 의지로 고군분투했던 동서고금 인간들을 둘러싼 경이로운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