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1)] 거물들 삐치고… 싸우고… 위원장은 괴로워!

입력 2011-03-24 18:11


1998년 9월 27일 오후 4시,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아시아 영화의 미래’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단상에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현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토론토영화제 프로그래머 데이비드 오버비(작고), 프랑스 영화평론가 피엘 리시앙과 막스 테시에 등이 자리했습니다. 아시아영화 전문가들입니다. 부산프로모션플랜(PPP) 출범과 함께 열린 세미나에서 많은 의견이 개진됐습니다.

그런데, 이 세미나가 두고두고 회자된 건 참석자 면면 때문입니다. 마르코 뮐러와 토니 레인즈, 피엘 리시앙과 데이비드 오버비 그리고 피엘 리시앙과 막스 테시에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피엘 리시앙과 토니 레인즈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한자리에 앉은 것 자체가 뉴스거리였습니다. ‘불협화음의 극치’였죠. 영화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명장면을 연출한 겁니다.

누가 토니 좀 말려줘요

이처럼 세계 영화계는 친소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인맥을 구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창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96년 4월 10일, 저는 서울 성북동 스위스대사관 ‘문정관(問情官)’ 집에 초대됐습니다. 마르코 뮐러의 방한을 계기로 그와 친척인 스위스 문정관이 마련한 자리였고, 마르코와는 구면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부산국제영화제 창설을 위한 조언과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며 경험담을 들려줬습니다. 한창 대화가 진행되다 저는 무심코 영국의 토니 레인즈가 우리를 돕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마르코의 안색이 변하더니 “토니와 잘해보라”면서 얘기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 후 칸에서 만나 부산영화제에 초청했지만 두 해 연속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98년 PPP 세미나에 참가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로마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중국통입니다. 영국 태생인 토니는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해 홍콩영화제 창설에 관여했고 중국 감독들을 해외에 꾸준히 소개해 왔습니다. 둘 다 중국영화 전문가로 라이벌 관계여서 지금도 사이가 좋을 수 없습니다.

토니를 싫어하는 영화인도 적지 않습니다. 1회 부산영화제가 끝나고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난 외국 언론인은 제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고 인사하자 대뜸 “아, 그 토니영화제” 하며 대놓고 비하하는 말을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97년 싱가포르영화제에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영국 영화평론가 데렉 말콤(국제비평가연맹 회장)도 ‘반(反)토니파’ 중 한 명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뚱뚱한 토니는 체구와 달리 어떤 때는 여자처럼 마음이 여립니다. 그와 만날 때는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언젠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만났는데 저를 보자마자 외면하더군요. 당황해서 그 이유를 추적했습니다. 원인은 부산영화제에서 자신에게 자문수당은 주면서 별다른 자문도 구하지 않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해를 푸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2002년 7월 저는 토니 레인즈, 사이먼 필드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시애틀영화제에 참석했습니다. 하루는 영화관을 나서며 승용차에 오르는데 제가 무심코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뒷자리에 프랑스 여성 평론가와 사이먼, 토니가 앉게 됐죠. 그런데 차에 타려던 토니가 갑자기 뒷문을 쾅 닫고 걸어가 버렸습니다. 사이먼에게 내가 뭘 잘못한 것 아니냐고 물으니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토니는 나를 본 척도 않고 아침을 먹다가 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저녁, 외면하고 있는 토니에게 나 때문에 화났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더군요. 체구가 큰 두 남성과 여성을 뒷자리에 타게 하고 혼자 앞에 앉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겁니다. 저는 즉시 사과했고 그도 어느 정도 화가 풀렸지만, 몇 달 후 부천영화제에서 만나서야 화해했습니다. 그는 싫고 좋은 게 분명합니다. 그가 싫어하는 칸·베니스·싱가포르 영화제에선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베를린영화제의 ‘앙숙’ 커플

울리히 그레고르 부부와 모리츠 데 하델른 부부도 자타가 공인하는 ‘앙숙’입니다. 영국 태생으로 스위스에서 성장한 모리츠 데 하델른은 세계 영화계의 ‘정치 9단’입니다. 72년부터 7년간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거처 79년부터 2001년까지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무려 22년간 지냈습니다. 영화평론가 울리히 그레고르는 70년 부인 에리카와 함께 베를린영화제 ‘영 포럼(International Forum of Young Cinema)’ 부문을 창설해 무려 31년 동안 이끌어 왔습니다. 그는 2001년 모리츠 데 하델른과 동반 퇴진했습니다.

79년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새로 선임할 때, 오랫동안 베를린영화제에서 일해 온 울리히가 당연히 물망에 올랐는데 모리츠로 낙점됐습니다. 그 후 모리츠의 계약기간이 만료될 때면 울리히가 강력한 후임자로 거론됐습니다. 2000년을 전후해 평단에서는 울리히가 맡은 영 포럼의 영화 선정이 모리츠의 경쟁부문보다 우수하다는 말도 퍼졌습니다. 울리히는 영 포럼을 베를린영화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고 공언도 했습니다. 이처럼 둘은 베를린영화제의 쌍두마차였음에도 오랜 숙적입니다.

부산영화제를 출범시키면서 울리히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자 했지만, 선약 때문에 평론가이기도 한 부인 에리카를 심사위원으로 초대했습니다. 이것이 모리츠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해 11월, 영화 선정을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찾은 모리츠는 부산영화제 카탈로그를 보는 순간 에리카가 어떻게 심사위원을 할 수 있느냐고 폭언하면서 영화도 보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음 해 1월,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부산영화제와 자매결연 행사를 갖고, 파리에 들러 질 자콥 칸영화제 집행위원장(현 조직위원장)을 예방한 뒤 베를린영화제로 갔습니다. 영 포럼에서 초청한 ‘김기영 감독 회고전’에 참석하고 모리츠 집행위원장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였습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울리히의 영 포럼 부문에는 한국영화가 잘 소개되고 있었지만, 모리츠의 본선 경쟁부문에는 몇 년째 우리 영화가 선정되지 못해서 그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리츠는 나를 만나자마자 4개항만 묻겠다면서 에리카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이유, 로테르담에서 어떤 행사를 가졌는지, 칸영화제와는 무슨 유착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부산영화제가 존속할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직설적이었고, 밑바탕에는 부산영화제와 울리히 부부의 우호적 관계에 대한 불만, 칸영화제에 대한 경쟁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칸과 베니스에서 몇 차례 그를 만났고, 98년 제3회 부산영화제에서 그와 질 자콥에게 ‘한국영화공로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리츠의 수상 소식을 들은 에리카가 대노했습니다. 이미 1회 부산영화제에서 남편이 이 상을 제일 먼저 받았지만 그녀의 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해명 편지도 보내고, 칸에서도 만났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앙금은 2002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심사를 남편 울리히와 함께하면서 완전히 없앨 수 있었습니다. 실로 3년 반 동안 정성을 쏟아 그 부부와의 관계를 복원한 셈입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지금은 그 이전보다 친해졌고, 제10회 영화제 때 그들 부부는 또다시 부산을 찾았습니다. 물론 모리츠 부부도 한국영화공로상 이후 친해질 수 있었고, 그가 베니스집행위원장으로 옮겼을 때나 뉴몬트리올영화제를 창설했을 때, 그 자리마저 물러난 지금도 친하게 지냅니다.

집행위원장들의 고민 ‘인맥’

피엘 리시앙과 아루나 바슈데프는 ‘최악’의 케이스입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프랑스 평론가 피엘은 불같은 성격입니다. 칸의 질 자콥과 절친한 그는 한국영화를 칸에 진출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아시아영화진흥기구 창설자이자 회장인 인도의 아루나 바슈데프 여사는 부회장인 저와 동갑내기입니다. 그녀를 싫어하는 피엘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입니다. 아루나에게 물어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2002년과 200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취화선’(임권택)과 ‘밀양’(이창동)을 위한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 피엘은 아루나가 참석 못하게 미리 조치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파티에 나타나자 ‘난동’을 부렸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양쪽과 친한 저는 항상 중재자일 수밖에 없죠.

이처럼 친소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힌 곳이 바로 세계 영화계입니다.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인간관계 속에서, 기호와 개성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모두와 친구가 되는’ 독자적 인맥을 형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영화제를 이끄는 집행위원장들의 고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