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에 도사린 삶의 재난들… 편혜영 작품집 ‘저녁의 구애’
입력 2011-03-23 17:46
“도시는 두 개의 지질학적 판이 만나는 근처에 있었고 오래 전에는 기록에 남을 만한 강진이 있었다. 김이 태어난 직후의 일이었지만 위험을 경고할 때면 항상 언급되는 지진이었다. 보강되지 않은 전력선이나 수도관, 가스관이 끊어졌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저녁의 구애’에서)
하드보일드 문체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상상력으로 주목받는 소설가 편혜영(39)의 세 번째 작품집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표제작은 공교롭게도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케 하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 속 주인공 ‘김’의 직업은 화원 주인이다. ‘김’은 만난지 10년도 넘은 친구로부터 근조 화환을 주문 받고 남쪽으로 380㎞ 떨어진 도시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조화(弔花)를 가져간다. 장례식장에 도착할 무렵,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아직 안 돌아가셨어. 오래 못 버티실 거야. 병원에서 나랑 같이 임종을 기다리지 뭐.”
‘김’은 누군가 죽어가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지 않아 친구와 합류하는 대신 인근 우동집으로 간다. 우동을 먹고 나왔을 때는 58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얼마간 누군가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도시의 특산품인 통조림을 선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통조림은 사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지진이나 쓰나미를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뿐, 한번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김에게 지진은 먼 땅 어딘가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전쟁 얘기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피해를 안긴 다른 나라의 쓰나미나 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있다는 얘기와도 같았다. 김에게는 화원의 꽃이 팔리기도 전에 시들어 죽거나, 누군가 돌을 던져 화원의 유리를 깨뜨리고 도망가는 게 전쟁이나 지진보다 더 불운이었다.”(51쪽)
그는 장례식장 주변의 국도에서 트럭이 미끄러져 전복되는 불의의 사고를 목격하고도 병원이나 경찰에 전화를 걸지 않고 오히려 사귀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타인에게 닥친 재난은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후경화된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느닷없는 고백의 방식이 장례식장의 간판과 불타는 트럭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전율한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하는 것은 순전히 김이 검은 밤의 국도변에 홀로 서 있으며 근처에 빛을 내는 것이라고는 장례식장의 간판과 불타는 트럭뿐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61쪽)
편혜영은 초기작에 자주 등장했던 그로테스크한 소재들, 가령 시체나 쓰레기나 악취 대신에 이처럼 일상에 도사린 섬뜩한 미궁을 포착하고 있다. 소설집은 일상 자체가 미궁과 재난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록된 단편 8편은 각종 문학상 수상과 우수작에 거명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작품들이다. 2년 전, 오랜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편씨는 “소설을 쓰는 일이 매번 같은 강도의 노동을 반복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나는 좀 달라졌다. 소설 쓰는 일의 묵묵한 숙련방식을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고 말했다.정
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