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문 (4) 거장 김수용 감독 앞에서 ‘배우론’ 들먹여

입력 2011-03-23 17:51


“이봐! 자네 그 얼굴로 배우를 한다고? 배우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미남도 아니고, 개성도 없잖아!”

감독님은 벅찬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하려는 나를 향해 다짜고짜 호통부터 쳤다. 미남이 아니어서 넌 배우를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니,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배우가 얼굴을 팔아먹고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는 새 감독님을 향해 따지듯 생각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감독님!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론을 보십시오. 그는 배우로서 가장 대성할 수 있는 외양적 조건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단지 그 사람의 상상력뿐이라고요.”

감히 내가 감독님 앞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를 얘기하다니…. 러시아 태생의 연출가 겸 배우로서 배우론을 정립한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1863∼1938)에 대해 거론하자, 감독님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아마 연기 좀 해보겠다며 껄렁대는 불량한 청년 정도로 나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순간 나도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의견들을 굽히지 않고 밝혔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왜 유독 미남 미녀들을 찾는 겁니까?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그렇게 잘난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닙니다. 제가 주인공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처럼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역할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언뜻 감독님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이 살짝 풀린 듯했다. ‘어, 이놈 봐라?’란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기보다 뚜렷한 목표와 당돌하기까지 한 나를 감독님은 잘 본 듯했다. 그날 첫 만남에서 4시간 가까이 감독과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대화는 마치 면접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감독이 질문하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자유롭게 대답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감독은 어떻게든 어려운 질문을 해서 나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란 심정으로 감독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형태였다.

이윽고 감독님이 나직이 말했다. “좋아. 자네는 내일부터 우리 영화 촬영장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워 봐. 내일 아침 6시 충무로에 있는 스타 다방으로 나와. 조감독을 보낼게. 그리 알고 가 봐.”

짜릿한 감동이었다. 감독님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를 유심히 보는 듯했지만, 그는 나의 내면에 숨겨둔 집념과 열정을 본 것이다. 그토록 열망했던 배우의 길이 트이는구나 싶어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이날 나에게 배우의 첫 걸음을 떼게 해준 그 분이 바로 데뷔작 ‘맨발의 영광’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님이시다.

내 삶에서 감독님과의 만남은 정말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김인문’이란 연기자를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단련시키셨고, 결국엔 이 같은 아름다운 만남으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꿈이 다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틈틈이 극장가를 누비며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도시의 모습들을 관찰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하나 둘씩 입력해두었다. 그렇게 나는 ‘기적의 주인공 김인문’을 만들어갔다.

요즘 젊은 후배들을 보면 돈 없고 백 없다면 금세 포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주신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