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일본 교토 ‘고향의 집’ 김만근 할머니

입력 2011-03-23 19:04


“어릴적 ‘조센진와 닌니쿠사이(조선인은 마늘냄새)’라고 놀림 당했지”

김만근(89) 할머니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현해탄을 건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가면 잘살 줄 알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노동뿐이었다. 생활은 곤고했다. 김 할머니는 열일곱에 네 살 위인 동향 청년과 결혼했다. 시댁은 베를 짜 팔았다. 당시 한국인들의 베 짜는 기술은 알아줬다. 친정 부모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3남1녀 중 첫째인 할머니만 일본에 남았다. 학창시절엔 ‘조센진 닌니쿠사이’(마늘냄새 나는 조선인)라는 놀림에 시달렸고, 결혼해 6남매를 낳아 기르면서는 가난에 힘겨워했다. 망향. 고향은 늘 그리운 곳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손자는 일본인 처를 얻었고, 손자며느리는 할머니를 ‘오까상(어머님)’이라며 따른다. 할아버지는 1년여 전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할머니. 교토 ‘고향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8일 고향의 집 ‘운사홀’에서 열린 예천통명농요(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 공연을 보고 난 할머니는 “모 숨그는(모 심는) 건 처음 봐. 잘하네. 참 잘하네”라며 감탄했다. 인터뷰는 할머니의 방에서 진행됐다.

타향살이 82년

우리 오마이는 내를 돌이라 꼸다<불렀다>. 여물라고 돌이라 꼸다. 우리는 저 성주. 저 그 모꼬<뭐냐> 대구라 카는 데서 좀 드가면 성주라고. 촌에서 농사 질 때 그래 아버지가 일본 가자케<가자고 해서> 그 뒤로 일본에 있다. 우리 부모는 전장<한국전쟁> 끝나자, 고향에 가시고….

에이고 이제는 다 돼았어(나이가 찼다). 끝났는데 뭘. 아이고 오래 살았다. 이만하면 됐지. 하마 구십이 다 돼았는데. 팔십여덟이라카이.

(기자에게) 고히<커피>도 없고, 일본 빵 하나 줄까. 빵 하나 묵어봐. 일본 빵.

쪼맨할<어릴> 때 왔다. 고향 가가지고. 나는 시집을 보내사 여기 집에 시집 와 삐서<와 버려서> 고상했지. 중신. 우리 고향 사람잉께로 모두 여 마이<많이> 살거든. 고향 사람이라고 아들 영감 하나뿌(뿐)인데 그래 고향이 한 고향이라고 날 열일곱 살에 왔잖아. 아무것도 모르는데.

전장 때<태평양전쟁> 우리 집 주인이 갔지. 우리 주인이 골(그)때는 저그때<일본이> 전장이 지게 된기로(지게 되니까) 고만 전장 나오라케서 저어 미국 전장 갔잖아. 가 가지고 살아왔어. 3년 하고. 조게 그 모꼬 <하와이진주만 습격 때>. 그 무렵 모다<모두> 갔다. 전장 가기는 가도 일본 사람인냥 그래 데려가지는 안애(않아). 그 사람들 심바람<심부름> 하는 기다. 총 넣는 거 떨어지면 그것도 갔다 날라야 되고. 그런 거 하려고 델꾸 가는 거 아니가. 일본이 전장 많이 했다. 다이또 센소<대동아전쟁> 해가지고나.

주인양반 전장 가고 없는데 아 서이(애 셋) 냅두고(놔두고) 시아바지 어마니 모시고. 아 서이 나두고 가비린데 그거 키우느라고 식겁을 했다.

우리 부모는 한국 갔잖아. 촌에 집이 있거든. 나는 치와 놓고(안 데리고) 갔지. 우리 부모님은 일찌간히(일찌감치) 왔다. 돈 벌러. 일은 있나 어데. 일 시켜주나. 노가다 흙 파는 거 그런기나 하지 할 기 있나. 우리 부모들 다 고상하고 호강도 못하고 돌아가고. 전장 끝나고 나서 한국도 디비져(뒤집어져) 가지고 구월에 갔거든 그래 고상 마이 했다.

베 짜는 조센진

그래 가지고 뭐 다리(다른 이) 가는 데 따라가서 쌀도 쪼매 팔고 마 보리도 좀 팔고 그러다 3년 댕게(되니까) 영감이 왔어. 와 가지고 비<베>를 짰거든 우리는 일본 사람 비. 그걸 짜가지고. 야아 마이도 못 벌었다. 나까 나까꽤 또 그것도 머리도 있는 사람이 해야 되지 모르는 사람이 하면 마 심바람하다 치우고나(심부름만 하다 끝난다). 전장 무렵엔 몬(못) 사는 사람 많았지. 일본 전장해서 졌잖아. 그래 가지고 마 거시 있지만은 일본에는 무명(문명화)이 얼릉 돼었버려(됐다). 마음이 한 단체가(하나가) 돼 가지고 그런가봐. 먹고 사는 것도 뭐. 쌀도 배급이지만은 배급받아가 먹고.

한국말. 우리 엄마가 한국말 하셨거든 아버지도. 우리 부모님 일본말 모른다 그리 오래 살아도. 나쁜 말은 알아도(웃음). 내 핵교 댕겼는데 댕기다 이살 왔는데 밤 야학교 다녔지. 나는 핵교도 쪼매 갔고 일본 아들하고 놀고 절로 배워지잖아.

아 그것(놀림)도 당했지. 첨에는 그랬지만은 요새는 안 그런다. 요새는 그러면 큰일 날라고. 한국 사람이 마니 거시기 됐는데. 예전에는 마니 모지라가지고 그랬지. 뭐 클 때는 우리는 마 나갈 줄도 모르고 엄마랑 있다 보니께는 핵교 들어가매 조센진이라고 하매 업슨여기여. 뭐 안 놀아도 괜찮잖아. 지 혼자 돌아 댕기면서(혼자 다니면서 놀아도 된다). 좋은 사람은 안 그렇지만은 야빠리<역시> 그런 애들이 있어. “조센진<조선인> 닌니쿠<마늘내>.” 마늘내 난다고. “조센진와 닌니쿠사이<조선인은 마늘냄새>.” 요샌 왜놈들이 더 먹을 라 한다. 닌니쿠를. 일본 사람 농사지은 닌니쿠는 맛이 없어. 야빠리 우리 고향에서 지은 마늘은 조금 넣어도 거시(맛이) 있는데. 그렇지만은 팔리 안하지(여기선 팔리지 않지).

아들이 마카 일본사람과 같다. 조선말 해도 못 알아듣지. 못 알아듣는다. 안돼 안돼. 내가 안 쓰니께로 고마. 핵교 대니면 친구가 마카 그것(일본사람)뿐이지.

오매불망 내 고향

고향에 내가 간 지가 한 3년 넘었다나. 지끔도 오라케 쌌는데(오라 하는데) 부산서. 우리 동상들이 마카(조금도 남김없이) 부산에 있거든. 짐 부쳤다고 낼 모레 온다고 우리 남동상하고 여동생 둘 살아가 있다. 자꾸 나오라케 싼다. 안 나오면 우리가 갈까요 그래 싼다. 고향에 가도 누가 있나. 부산에 동상들 다 있다. 두룻하게<오붓하게> 사니께로는 아들 다 장가가고.

요 저이 저이 군인, 저그 순사를 뭐라 케노. 경찰관. (매제가) 한국서 경찰관인데 이제 그만뒀어. 나이 많아노니 께이. 우리 동상은 어릴 때 한국 데려가지고 한국서 시집갔다.

우리 엄마. 내 하고 너이 뿐이라. 딸 서이고 아들 하나. 내가 제일 맏이야. 우리 엄마가 자꾸 한국 갈라케싸(가려고 해). 집도 있고 농사도 쪼매한 게 있으니께로.고향에 가니 농사짓고 못살겠더란다. 그래서 부산 내려갔다.

동상서 배타고 저어 멀리가고. 우리 엄마는 부산에서 야빠리 장사가 있어 장사. 그래도 먹고 살다 딸 둘 치우고, 아들이 살아가 있는데 몸이 안 좋아. 누님 보러 나오소. 내 성할 때 만나자고 자꾸 해싼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셨다. 하마 부산서 돌아가셨으니 오래됐다. 하아 안즉 그땐 젊었다. (내가) 마흔은 안됐지. 못 봤다. 갈 수 있으야 보지.

양로홈이 내 집

(고향의 집 직원이 차를 권하자) 난데모 이요(뭐든지 좋아).

(일본말이) 쉬버(쉬워). 일본말이 잘 나온다. 아 한국말 할라 카면(하려고 하면) 좀 더듬어. 한국말 할라카니께 어둔해 어둔해 말이. (여기 들어온 지는) 얼매 안됐다. 1년 됐나 고마. 내 집에 있었지. 팔다 안하고 아들이 우이 했는가 모르지. 들어왔는데도 돈이 들잖아. 돈 들지.

영감 돌아가시기 때문에 내가 이런 데 들어왔잖아. 혼재 있으니까 심심하고. 나이 많애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마.

내가 시집 와가지고 아들 서이 옷 짜 입히는 거 비와<배워> 가지고 그런 걸 짰잖아. 고래 오래 짰데이. 나중에 그거 짜 가지고도 안 되겠다 싶어 아들이 다 크니께는 장사를 해가지고. 집 장사도 해가고나. 부동산.

아들 너이, 딸 둘. 육남매 낳았다. 우리 아들 막내이 가는 집 짓는 장사 한다. 세께. 머라카노. 응 집 설계.

우리 큰아들은 나이 하마<벌써> 칠십이다. 다쿠시. 손님 싣는 차. 다쿠시라 안 카나. 콜 다쿠시. 우리 큰아들 고상했다. 대학 못 나왔다. 고꼬<고등학교>만 나왔다.

(옛 사진을 꺼내 들며) 마고 짱(손주) 생각하면 이 데쓰요(좋습니다)네. 우리 마고는 참 이쁘다. 와라떼. 와라떼 조다이(웃어 줘). 고향에서 부쳐온 게 있다 봐라. 이거 내(나), 우리 영감. 이거는 우리 동상 내우. 이 사람 김 부쳤다고 온다. 부산으로 잘 산데이. 우리 동상 집에 한번 가거든 찾아봐(부산 내려가면 동생 집 찾아가보라고). 일본에도 왔다 갔어. 이거는 우리 큰아들하고 중학교 들어갈 때. 이거 할매(나다). 우리 큰아들. 제일 맏이 핵교 드갈 때.

나까 나까<상당히> 식구 많은 집에나 어렵다. 저그 먹고 살고 나 죽어도 아무 걱정<생각> 없다. 걱정해봤자 아무 할 수 없다.

조총련과 민단

조총련. 요 조총련 많데이. 나는 조총련 안하지마난 요 마이 있다 카다. 나도 몰랬어. 조총련 보내면 안돼. 그 때무로<때문에> 결혼하기가 어려워. 일본사람들 여서 큰 아들(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괜찮아. 나이 먹은 사람은, 자기네들도 민단이라 카면 마 저그도 싫다 케요. 얘기가 안 맞거든. 근데 요새는 그렇게 안 그러는 거 아이가. 우리는 고향에 얼매든지 가잖아. 조총련 사람 되면 마이 못 간데이. 아노(그리고) 파스포뜨<한국 여권>가 없으면 못 간다.

안 외롭다. 내 살던데 저 마다 여서 멀다. 여 오기 전에 있을 때 거 가면 친구들도 많고. 자꾸 오라케 싸는데 갈 수가 있나. 한번 옮기면나. 일본 사람도 거 오래 있다 보이 학교를 마카 일본 핵교를 다녔거든. 뭐시 있으면 모여가지고. 아는 사람도 많애. 있어 있어. 좋은 사람 많지.

나쁜 사람은 야빠리 차별하지. 우리들은 말이 검방<금방> 만나 거시기 포가 없거든(한국인인지 표가 안 난다) 그치만은 할매들은 우리보다 더 할매들은 알아듣긴 다 알아듣넨 데 말 할라카면 포가 나요. 그래도 일본 사람들도 마이 문명됐어. 조선사람 차별 많이 안한다. 그 전에는 조셍이라 하면 차별한다. 지금 와가지고는 우리들도 그대로 대우하니께는 그렇게 차별 안한다.

여게서는 할매들이 앉을 때가 없으면 내가 비와주고(비워주고) 앉으라카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들어 와 앉았다. 불쌍하잖아. 넘으 땅에 와서 고생도 하고나 아무래도 넘으 나라 온 사람들은 다 고생했다. 그렇지만 그래 들어온 사람 다 부자됐데이. 한국사람 얼매나 잘 사는지 아나. 빠찡꼬오락실 크게 하고 나. 아노 조선 사람은 머리가 좋아 그래노이 일본 사람 부려먹고도 자기는 안 들어가거든. 빠찡꼬<오락실> 크게 하는 데 그런 사람 다 부자 아이가. 우리는 막 그냥 살아. 돈이라 카는 거는 간단히 붙는 게 아니라.

야빠리 그리스도교

여도 교까이<교회> 있다. 우리 시어마시가 믿었거든 나는 세례도 안 받아봤고 못해봤지만은 시어마시가 댕기던 데로 마카. 열십자<십자가> 딱 해가지고 여 있잖아. 고일<일요일> 날은 가봐라. 교회 댕기? 고일 날은 가봐. 한국사람 마이 온다. 절도 있어 그치만은 아노 야빠리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라 카거든. 모다 가는 사람 다 간다. 나는 여서 (예배) 한다. 여 밑에서 한다. 그 꺼지는 아직 갈 거스는 없어. 그 사람들 다 오래오래 믿는 사람이 되니까는. 나오라카지만은 한번 가면 또 치울 수 없잖아. 우리 집에 안 믿었다. 그래노이께는 어중간해요. 시어마시도 우리 집에 바로 시어머이가 아니라. 아버님이 상처해가지고 만난 내우간이 되다 보니. 그래도 나 시어머니가 댕기던데 싶어서 고일날은 점심 먹고 삼지, 석점<3시>에 한다. 아. 그래 가가지고 목사가 와서 연설하고 모 가마이 있으면 기도가 안 되나 마. 모 그 카다 죽으면 그만이지. 인제 죽는 거밖에 안 바란다. 아이고 인제 나도 고향에 한번 가야 되는데.

■ 고향의 집

고향의 집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고령자를 위한 복지시설이다. 일본에서는 특별양호노인홈으로 불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양로원과 요양원을 합친 시설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윤기(69) 이사장이 1989년 사카이를 시작으로 오사카(1994), 고베(2001), 교토(2009)에 고향의 집을 지었다.

우연한 계기였다. 1983년 아이치현에서 한 재일동포 노인의 주검이 13일 만에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고 한국에서 외롭게 일생을 마친 일본인 어머니 생각이 났다는 윤 이사장. 그의 어머니는 목포에서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여년간 3000여명의 고아를 길러낸 윤학자(다우치 지즈코) 여사다. 한복 저고리에 치마를 고집한 어머니였지만 임종을 앞두고는 ‘우메보시가 다베다이(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다)’라고 일본어로 말했던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어떻게든 재일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 이사장은 아사히신문 논단에 관련 글을 기고했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꿈은 양심 있는 일본인과 재일동포 한국인의 모금 행렬이 이어지면서 ‘고향의 집 완공’이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고향의 집에선 100여명의 재일 한국인·일본인 노인이 함께 생활한다. 치매를 앓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대다수다. 김치와 우메보시가 한 상에 오르고 온돌이 있으면 다다미가, 아리랑이 있으면 엔카도 있다. 도쿄 고향의 집 건립을 추진 중인 윤 이사장의 목표는 일본 내 10개 시설을 세우는 것이다.

교토=사진·정리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