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봄으로 떠나는 순례
입력 2011-03-22 17:51
창문이 부옇게 흐려온다. 멀리 보이는 산이 아슴푸레해진다. 사선으로 긋는 빗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봄비가 내린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세상이 창조된 때를 봄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봄에 일을 시작한다. 성스러운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나는 계절도 봄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에게도 봄을 기다리는 낭만적인 풍습이 전해온다. 동짓날, 베이징에서는 여든한 장의 꽃잎이 달린 흰 매화를 그린다. 그 다음날부터 날씨에 따라 짙고 옅은 색으로 매일 꽃잎을 한 장씩 칠해 나간다. 그렇게 해서 그 꽃이 모두 칠해졌을 무렵에는 봄이 깊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 이렇게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은 마흔 장쯤의 매화꽃잎을 칠할 차례가 아닐까? 내게 꽃잎 하나를 칠하라고 한다면 빗물에 붓을 흔들어 그대로 쓸어내리리라. 그래서 화선지의 솜털 같은 움직임에서 봄이 눈뜨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겨울에 봄을 잇기란 쉽지 않나보다. 파르르 암상을 떨던 시새움 뒤에야 봄비는 얼어붙은 대지를 어루만진다. 쓰라렸던 눈보라의 상흔에 봄비는 발라주고 처매며 돋아 오르는 새순의 물관에 빗줄기를 덧대고 있다. 그제야 인고의 시간으로 기다려온 나무들은 하얀 뿌리를 내릴 것이다. 연둣빛 여린 촉을 가만히 내밀 것이다.
하늘색 우산을 든 여인이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빗물에 패이지 않은 땅을 골라 딛는다. 우리의 운명도 비 오는 날 우산으로 가릴 수 있다면, 마른 땅을 골라 디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운명은 희랍어로 모이라(moira), 즉 몫이라고 한다. 마음에 들든 내키지 않든 어차피 신이 부여해준 소중한 몫이 아니던가.
어제까지도 일손을 놀리던 벽돌공장도 오늘은 기척이 없다.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원통형 모터만 봄비에 수굿하니 서있다. 막사 안에는 흙 묻은 신발이 대여섯 켤레 모여 있다. 그 안의 떠들썩한 너털웃음도 봄비 속에 가라앉는다. 반쯤 마시다 만 탁주 한 사발 옆에 놓고 세상군자가 부럽지 않다며 허세라도 피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놀이터의 아이들도 원색으로 손짓하는 그네와 미끄럼틀을 돌아보지 않는다. 긴 장화를 신은 발로 철벙거린다. 모래밭을 헤치면 만들어지는 물웅덩이를 보며 입을 다물 줄 모른다. 그들은 저만치 뒹구는 우산의 존재도 잊은 지 오래다.
교문을 나서면 그리운 이가 금방이라도 우산을 씌워 줄 것만 같다. 꽃무늬 우산을 펼쳐들었다. 빗방울이 꽃술을 타고 흘러 우산살에 매달린다. 그 방울방울에 내 무딘 감성이 비로 녹아 포도 위를 적신다.
시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렁출렁 실려 간다. 나는 마치 봄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탄 기분이다. 정거장에 닿을 때마다 빗물은 버스바닥에 한데 모였다 흩어진다. 그 위에 사람들의 크고 작은 발자국이 무시로 새겨진다. 올록볼록한 모양의 발자국이 섞여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겨우내 녹지 않은 땅만 탓하며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본다. 이 봄에 나는 얼마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발자국을 그려낼지….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