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파도치는 영성

입력 2011-03-22 17:41


신령한 욕심을 가지라

‘이태백’ ‘사오정’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태백’은 20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말이고 ‘사오정’은 45세가 정년이라는 말로 사회에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만약 직장 없이 놀고 있는 그들에게 대기업에서 일자리를 준다고 한다면 우르르 지원해서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다닐 것이다.

직장일이라고 하면 만사 제쳐 놓고 그 일에 몰두하면서 회사가 새벽부터 출근하라고 해도, 늦게까지 야근을 시켜도 아무 말하지 않고 그대로 따를 것이다. 또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라도 당하게 되면 노조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난리를 내면서 어떻게든 회사에 계속 다니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육신이 먹고사는 일에는 이렇게 철저히 순종하고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저도 직장에 다닐 때 아무 잘못 없이 상사에게 야단을 맞을 때가 있었다. 그런 야단을 맞고 앉아 있으려면 사람인지라 자존심이 상한다. ‘에이, 이놈의 직장 그만 때려치워…’라고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 자리에서는 감히 말대꾸를 못한다.

그때만 해도 상사에게 말대꾸를 잘못 했다가는 당장 해고되던 때였다. 홧김에 사직서를 썼다. 아침에 써 놓고 퇴근할 때 틀림없이 내고 가리라 마음먹는데 막상 퇴근할 때가 되면 마음이 바뀌었다. 마누라와 자식들 먹여 살릴 생각을 하면 그렇게 쉽게 사직서를 낼 수가 없었다.

“상무님, 아침에 야단 잘 맞았습니다. 정신 차려서 잘 하겠습니다.”

“아, 그래. 앞으로 잘해.”

세상 말로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다. 하지만 그래도 먹고살아야 되니까 그냥 사직서를 못 내고 오히려 나가라고 할까 봐 꼭 붙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교회에서 새벽예배에 나오라고 해도 그렇게 안한다. 모임에 나오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나오면 그만이다. 그래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만약 교회 목회자나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당장에 “이 교회 아니면 다닐 교회가 없냐?” 하면서 교회를 떠나곤 한다.

결국 신앙생활을 직장생활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말로는 “영적 생활이 육신의 생활보다 귀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겉과 속,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말로는 “나는 세상 것보다 하늘의 것이 좋다. 영적인 것을 우선해야 한다”면서도 행동은 육의 것을 우선한다.

이것은 억지로 끌려다니는 이른바 ‘종의 믿음’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원해서 교회 일과 모임을 할 수 있는 ‘주인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주인은 내 일을 하는 것이라 능동적인 반면 종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라 아무런 발전이 없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 일처럼, 주인처럼 해야 한다. 소유하는 것만큼 내 것이 된다. 신령한 믿음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모함’이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기어이 필요한 믿음의 분량을 가지려고 노력하자. 할렐루야!

윤석전 목사 (연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