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문 (3) ‘배우 되겠다’ 공무원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
입력 2011-03-22 17:49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그 달란트는 눈에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복음을 전하는 데 달란트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달란트는 연기다. 크리스천 연예인으로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 하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나는 고향인 경기도 김포의 한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공무원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허송세월을 하는 것 같았다. 나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젊은 날을 이렇게 마냥 흘려보내는 게 안타까웠다.
결국 1963년 짐을 챙겨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부모님은 “정신 나간 놈”이라고 만류했지만, 배우가 되고픈 나의 열정을 꺾지 못하셨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착한 서울,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여관보다 방값이 싼 근로자합숙소에 있으면서 배우의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날만 밝으면 영화감독들의 집으로 향했다. 당대 유명한 A감독, B감독, C감독을 찾아갔다. 처음 간 곳이 A감독의 집이었다. 며칠 동안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조차 없었다. B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어느새 가지고 있던 돈도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합숙소로 돌아갈 수 없어 서울에서 가장 높은 남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 숲 속에서 잠을 청할 심산이었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그야말로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저렇게 많은 집들이 있건만, 내 한 몸 쉴 수 있는 공간이 없구나. 어쩌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노숙을 하게 되다니….” 서러움의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끝까지 헤쳐 나가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며 눈물을 닦았다.
남산에서 지낼 땐 한 푼도 없었다. 하도 배가 고파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를 몇 차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당시에는 한 번 피를 뽑으면 3000원을 받았다. 우선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를 뽑으니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생전 처음 피를 팔아 번 돈을 꼭 쥐고 찾아간 곳이 남대문시장 난전. 그곳에서 20원짜리 가락국수로 쓰린 속을 달랬다. 이렇게 사먹는 국수 두 그릇이 하루 끼니의 전부였다.
인생 밑바닥을 기면서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계속 유명 감독을 만나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 종일 충무로 거리를 헤맸다. C감독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군가 대답했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는 기쁨도 잠시, 감독님은 지방 촬영 중이라고 했다. 일단 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김인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내일 또 오겠습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갔다. 역시 안 계시다고 했다. 김인문이라고 인사만 하고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렇게 7개월 정도 매달렸다. 가락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근로자합숙소와 남산에서 지내 왔으니 나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C감독을 찾아갔다.
내 귀를 의심했다. “감독님이 들어오시라네요.” 마치 화석이라도 된 듯 몸이 굳었다. “드디어 감독님이 나를 만나주시는구나. 나를 불러들이시는구나!” 배우란 꿈을 다 이룬 것 같았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