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꿈과 공포의 미로

입력 2011-03-21 17:53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이바라키, 지바…. 꿈에서도 이 지명을 쓰고 있다. 쓰나미가 덮치고 간 동일본 해안에 위치한 현(縣)들의 이름을 마치 몸의 일부인 듯 반복해서 호명하고 있다. 그것은 통점으로서의 이름이다. 벌써 열하루째다. 마지막 지리 수업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대서양에서 사라진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해 처음 들었던 시절처럼 그 지명들이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를 본능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현실과 몽상 사이에서 아득히 소용돌이치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의 비명에 매일 밤 가위눌렸다.

NHK의 발 빠른 재난방송 덕분에 우리는 안방에 앉아 바다 건너 쓰나미에 휩쓸린 이들 6개현의 재앙을 생생한 동영상으로 보고 또 보고 있다. 참혹한 재앙의 현장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건 사각 평면 TV의 싸늘한 유리 화면에 떠오른 신기루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만큼 이 참혹극이 의미하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참혹 앞에서 인류는 겨우 용암으로 들끓고 있는 맨틀(mantle) 위에 한 겹 둘러진 땅에 간신히 발을 디딘 채 살아가고 있는 연약한 종족임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일본만이 열도가 아닌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상에 존립하고 있는 모든 국가는 지구 부피의 83%, 질량으로는 68%를 차지하는 맨틀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가 대항해야 할 적이 ‘자연’이라는 사실 앞에서 경악하고 만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다. 냄새도 없고 맛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 없는 듯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적.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가 녹고 그 없는 것에 DNA 구조가 바뀐다. 그것은 인류의 그늘이다.

1986년 4월 26일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설로 형상화한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보면 그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다. 원자력 발전소 간부인 아버지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소설은 안드레이의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격리 수용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방사능 피폭자의 주검은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타냐)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

작가는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을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의 욕망에서 찾고 있다. 이런 대목이 있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 “앞으로 세계에 건설될 원자력 발전소는 수천 기로, 1기당 사고의 위험성은 2만년에 한 번이라고 나와 있다. 얼핏 읽어보면 2만년에 한 번이 극히 적은 것 같지만, 만약 2000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고 계산한다면 10년에 한 번 사고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라고 썼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 그것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지구를 리셋(reset)하는 공포 앞에서 인류 문명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