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건용] 얼마나 멀면 먼 거예요?

입력 2011-03-21 17:58


“촌지 관행이 깊이 뿌리내리는 동안 하늘을 한번 우러러 보기나 했나”

“얼마나 멀면 먼 거예요(How far is far)?” 뜬금없이 이 말이 생각났다. 이 귀여운 물음은 미국 아이가 한 질문이라고 나의 선배 되는 음악교육학자가 소개했었다.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순진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이다. 어떤 때는 앞집이 멀다고 하다가 다른 때는 학교가 멀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은 또 먼 다른 나라에 비하면 바로 코앞이 된다. 그러나 먼 다른 나라도 멀리 떨어진 해에 비하면 가깝고 그 해도 저 먼먼 안드로메다 성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정말 얼마나 멀어야 먼 것인가?

이 물음을 다른 데에도 붙여 본다. “얼마나 비싸야 비싼 거예요?” 최근 안경을 하나 했는데 안경집에서 나에게 처음 보여준 것들은 대개 40만원 내외였다. 비싸다고 느껴 좀 더 싼 것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국내에서 만든 제품을 보여주었다. 처음 택했던 제품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20만원이었다. 이 경험을 어떤 자리에서 말했더니 공무원 후배 하나가 “안경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네요. 20만원도 너무 비싼 것 아녜요? 저는 동네에서 늘 5만원 정도에 사는데”라고 말했다. 내가 짐작하기로 40만원은 고사하고 몇 백 만원짜리 안경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티셔츠 한 장을 받아도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싸구려 선물은 차라리 들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더 고급의 선물을 해도 그렇다. 명품이 아니면 노발대발하는 사람도 있다. 명품이 되는 순간 값은 몇 배로 뛴다. “선물은 얼마나 좋아야 좋은 건가?” 혹은 “사람은 얼마나 잘나야 잘난 것인가?”

보도를 보면 한 음대 교수가 레슨 중 학생들을 때렸다고 그 학교에서 파면됐다. 학생들과 교수의 얘기가 다르다. 학생들은 그 교수가 “반주자 나가! 커튼 내려!” 하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교수는 성악교육의 특성상 어느 정도 신체 접촉은 필요하고 자신도 그렇게 공부했다고 한다. ‘원래 그런 것인데 왜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되는 것이냐?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폭력이 폭력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울지마 톤즈’를 보니 수단 아이들이 누런 강물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 수돗물은 그에 비하면 맑디맑은 물인데 그것도 찜찜하다고 우리는 생수를 사먹는다. 하기는 생수도 천차만별이어서 상표마다 다르고 어떤 수입 생수는 다른 것들보다 두 배는 족히 비싸다. 더러워 보이지만 그 누런 강물도 초원이 마르고 강이 마르고 목이 타는 아프리카 건기에는 생명수이리라. “얼마나 더러워야 더러운 것인가?”

국회의원들이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법을 만들려다가 여론의 뭇매를 받고 주춤하고 있다. 정치를 하려면 돈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너무 법을 빡빡하게 만들면 오히려 현실성이 없어지고 뒷거래가 많아지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좀 더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이번 법을 추진했다던가?

하기야 대학에서 학생회장 선거를 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세상이다. 플래카드를 만들고 포스터를 붙이고 회식을 하고 자원봉사자들 차비를 주고 하는 일에 모두 돈이 드니까 당연하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도 피자 값깨나 들어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니 기독교 단체장 선거에 돈이 들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벌써 오래 전부터 돈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약간의 선물 혹은 촌지를 건네는 관행은 우리 사회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터이고 위상이 위상이니 만큼 그에 걸맞은 금품이 오고갔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관행적인 일인데 왜 문제를 삼느냐”고 반발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음이 생긴다. “얼마나 더러워야 더러운 것인가?”

나는 답을 모른다. 모르는 채 윤동주의 시구가 생각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과연 하늘을 우러러 보는가? 잎새에 부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럴 시간이나 있는가?

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