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황세원 기자의 일본 취재 후기 "외로운 일본에 신뢰가 가장 큰 힘"
입력 2011-03-21 18:36
[미션라이프] 2006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침몰’이라는 영화를 봤다. 일본 제작사가 초청한 한국 기자단의 일원으로서였다. 20억엔(당시 약 200억원)을 들여 후지산이 폭발하고 일본 열도 대부분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화면을 그려 냈던 히구치 신지 감독은 기자단에게 “여러분은 지금 위험한 도시에 오신 겁니다. 빨리 서울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농담을 건넸다. 그 감독은 지금 일본의 상황에 어떤 심정일지 궁금해진다.
그 영화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부분은 두 가지다. 영화 막바지, 온 일본이 아비규환이 된 상황에서도 군인과 소방대원 등이 임무를 꿋꿋이 수행하는 장면이 하나다. 재난 대처 시스템에 대해 일본 국민이 가진 큰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 흥행 중이었던 영화 ‘괴물’이 저변에 깔고 있던 공권력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비교돼 씁쓸함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는 영화 중 일본 열도 전체가 불타는 컴퓨터그래픽 조감도가 나오는데, 유독 화면 한켠의 한반도가 안전하다는 데 눈길이 갔던 점이다. 한국 기자들 모두 마찬가지였던 듯 당시 감독에게 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감독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일본이 침몰해도 한반도는 안전하다더라”고 했다. 그 대답에 한국인으로서 느꼈던, 안도감과 우월감, 미안함 등이 기억난다.
지난 14~18일 4박5일간 일본 재난 현장을 취재하면서 느낀 이런저런 것들도 크게 이 두 가지와 연결된다.
◇믿었던 일본, 땅에 떨어진 신뢰=지진 나흘째이긴 해도 방사능 유출 위험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14일 오전, 인천 발 대한항공을 타고 일본 나리타로 향하는 심정은 복잡했다. 그러나 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일본 정부의 재난 대처 능력이었다. 피해 지역 복구와 이재민 지원, 후쿠시마 원전 문제 해결 등 모든 측면에서 점차 나아지리라 믿었다.
그 후 5일간 신뢰는 계속 무너졌다. 후쿠시마 제 1원전 내의 1~6호기가 계속해서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는데도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의 대응은 나아지는 게 없었고 “4호기 폭발” “노심 용융” 등 자막이 마치 “내일 전국 황사” 식 정보인 양 TV 화면 아래에 조용히 떠올랐다. 스마트폰으로 한국 기사를 검색해야 내가 있는 지역의 방사능 수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정부를 탓하는 이는 없었다. 식료품과 휘발유의 절대적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센다이 주민들조차도 “그만큼 이번 지진이 엄청났기 때문”이라고 할 뿐이었다. 원전에 대해서도 “최대한 안전하게 지은 것인데 워낙 큰 지진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들 했다.
일본에서 만난 한인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한국 민간 단체들의 구호에 거부감을 표했다. 특히 의사가 직접 와서 진료한다든지, 한국에서 물품을 실어 보내는 식은 일본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아이티나 스리랑카와는 다른 ‘선진국’이라는 자부심도 엿보였다. 그러나 지진 발생 열흘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해결이 안 되는 걸 보면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은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구라도 어려움에 처하면 도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급기야 17일자 아사히신문은 후쿠시마 미와테 미야기현 대피소의 이재민들이 잇따라 숨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에서 본 TV 뉴스에서는 “대피소에서 엄마들이 아기의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지 못 하자 아기들이 배변을 참아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센다이 주민의 얘기를 들어봐도 16일에 이미 하루에 오니기리(주먹밥) 하나, 물 한 컵, 바나나 한 개로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북동부에 폭설이 내리는 등 기온이 낮아 동사 위험도 컸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우리 팀이 직접 확인했지만 도쿄에서 센다이까지 고속도로는 지진으로 끊긴 곳 없이 온전했다. 쉬지 않고 달리면 4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니 소방차 구급차 군용차 등이 오가고 있었다. 또 우리 팀이 그랬던 것처럼 구호 단체라면 경찰에서 ‘긴급’ 비표를 받아 고속도로를 통해 재난지역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이재민이 굶어죽고 얼어죽는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아마도 한국이라면 진작에 민간 단체, 종교 단체 등이 너도나도 들어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정부는 이런 상황을 알고나 있나” “국회의원은 지역구에 가보기나 했나” 하는 질타를 쏟아냈을 것이다. 자기 집 쌀을 가져가 장작불에 솥 걸고라도 밥을 해서 먹였을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허겁지겁 다른 지역의 자원을 끌어당겨서라도 당장의 비난을 모면하려 했을 것이다. 국가 전체가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호들갑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랬다면 지진 때 살아남은 사람이 아깝게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차분한 이유=이번 취재 내내 느낀 또 하나의 감정은 이번 재난에 대한 일본 내외의 반응이 참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현재 분위기만으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위기감은 스마트폰으로 한국 기사를 볼 때 쓰나미처럼 밀려 왔다. 가족과 친지들은 “당장 돌아오라”고 다그쳤다.
물론 일본 내에도 위기감은 있다. 사재기 열풍부터가 그 척도다. 14일 지바의 대형마트에서 2ℓ 들이 생수를 1인당 6병까지 살 수 있었다면 17일에는 어디서도 생수를 구하기 어려웠다. 한 선교사는 “많은 경우에 집에 물과 식품을 쌓아놓고도 또 사러 나온다”고 했다. 언제 또 수도나 전기가 끊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퍼져 있는 것이다.
방사능에 대한 걱정도 은연중에 보였다. 도치키현 사노시의 한 대형마트에 들렀을 때 안경점 앞 매대에는 눈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보호 안경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었다. 안경점 점원은 “황사 때문에 가지고 있던 재고품이 이렇게 팔릴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럼에도 전반적 분위기는 차분한 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1억2000여명의 일본인이 살아가야 하는 땅인 것이다. 그 중에는 아기도 어린이도 임신부도 있다. 자국민 대피령을 발표하고 전세기나 군함을 이용해 데려가거나, 바람에 행여 방사능이 실려 올까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웃나라들 반응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수심은 더 깊어질 것이다.
이번 취재 중 일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도 없지만 “이렇게 어려울 때 일본에 와 준 것” 자체가 고맙다는 것이다. 일본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외로움이 전해져 왔다.
그런 속에서도 18일 오전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한두 시간 남은 일본 체류 기간 안에 또다시 대형 지진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차에서 내려서도 빨리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고 서두르다 일행을 태워다 준 한인 선교사가 악수를 청하자 계면쩍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일본 취재는 끝났다.
돌아오면서 과연 앞으로 일본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비록 늦어지긴 했지만 일본은 자국민들이 보내주는 신뢰를 결국은 회복하고 재난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킬 것이다. 일본인들은 특유의 저력으로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빠른 시일 내에 경제 대국, 관광 대국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믿어주는 것이 일본이 가장 원하는 도움이 아닐까 싶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