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60) 조선시대 한반도 지진 기록
입력 2011-03-20 17:35
일본 열도를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 한반도라고 해서 안전지대는 아닐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와 유사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중종은 1525년 12월 15일 내린 전교(傳敎)에서 “올해 경기 지역 가뭄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인데다 일식, 지진, 동뢰(겨울 우레), 해일 등 변괴가 일다가 마침내는 흰 운기(雲氣)가 해를 꿰기까지 했다”고 적었지요.
중종의 아들 명종 역시 비슷한 일로 골머리를 앓았답니다. 명종실록 1557년 4월 4일자 기록을 보면 함경도 함흥과 평안도 용천·창성·곽산·의주 일대에 천둥 번개가 치고 북풍이 크게 불었으며 물을 쏟아붓듯 우박이 내렸는가 하면 청홍도(충청도) 서천에는 조수가 범람해 해변의 제방과 전답을 덮쳐 3000여결(結)이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현종 9년(1668) 6월 23일에는 “평안도 철산에서 바닷물이 크게 넘치고 지진이 일어나 지붕의 기와가 모두 기울어졌으며 사람이 더러 놀라 엎어지기도 했다”고 적었으며, 효종이 즉위한 1649년 11월 6일에는 “전남도의 부안·함열·옥구·무장·만경·고부 등지의 여섯 고을에 해일이 일어나고 여산과 함열에서는 지진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숙종실록 1681년 5월 11일자는 해일을 동반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숱한 피해가 생겼다는 사실을 남기고 있지요.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의 신흥사와 계조굴의 큰 바위가 모두 붕괴했다.”
이 사태로 삼척 서쪽 두타산 층암이 붕괴되고, 동쪽 능파대 물속 10여장(丈) 되는 돌 가운데가 부러졌다는 겁니다. 이후 강릉·양양·삼척·울진·평해·정선 등지의 고을에서 10여 차례나 땅이 움직였는데 이 때 조선 8도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영조 20년(1744) 8월 9일 관측된 해일은 지진과 연동했다는 점에서 쓰나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한반도 지진 관련 문헌은 다수 있지만 국가지정문화재에 남아 있는 기록은 별로 없답니다. 벨기에 출신 천문학자이자 선교사인 남회인(본명 페르난드 베르비스트)이 1674년 중국 베이징에서 펴낸 세계지도 ‘곤여전도(坤輿全圖)’를 조선 철종 때(1860년) 다시 판각한 목판(보물 882호·서울대 규장각 소장)은 동아시아 지역의 지진 흔적을 새긴 유일한 기록이라고나 할까요.
3쪽 양면 6판으로 이뤄진 이 목판 한 폭의 크기는 가로 68.7㎝, 세로 177.5㎝이고 지도부분은 가로 51㎝, 세로 144㎝로 국내 목판지도 가운데 가장 큰 것이랍니다. 원래는 서반구와 동반구가 포함된 지도와 함께 양쪽에 지진, 인물, 강과 하천, 산악 등에 대한 해설부분이 따로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목판에는 빠져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