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리테르-영화하는 문학 문학하는 영화’… ‘映-文’ 두 장르는 몇 寸?
입력 2011-03-18 17:20
영화는 ‘지극히 20세기의’ 예술이자 현대에 와서야 가능해진 문학과 연극과 음악과 미술의 총체이다. 지난 시간 영화예술이 그 소재와 세계관 면에서 문학에 빚진 것 못지않게, 문학도 영화의 출현 이후 변해왔다. ‘시네리테르(Cineliter)-영화하는 문학 문학하는 영화’(문예중앙)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외연을 넓혀 온 두 장르의 예술에 관한 평론이자 에세이다. 백지은·신형철·정한아·함돈균 등 17명의 문학가 혹은 영화인들이 분석한 ‘영화적 문학’ 혹은 ‘문학적 영화’에 관한 글이 실렸다. ‘살인의 추억’, ‘스캔들’, ‘올드보이’, ‘가족의 탄생’, ‘천국보다 낯선’ 등 한번쯤은 보았거나 들어보기라도 했음직한 영화들이 대상이다.
2011년 현재 영화와 문학의 상호작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얼핏 철 지난 유행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가 현대예술의 총화로 당당히 군림하는 동안 문학은 문학 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유리되었다. 백지은은 둘의 관계를 “다른 동네로 이사한 뒤 어쩐지 소원해진 두 친구”에 빗대어 “처음부터 도둑질의 명수였던 영화를 문학 쪽에서 껴안으려 하자 문학은 풍요로워지기는커녕 빈곤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영화는 문학에 등돌리기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영화적 글쓰기’라는 낯선 방식에 성공하고 있는 소설가 박민규와 ‘문학이 되고자 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들어 ‘문학적’이라거나 ‘영화적’이라는 용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신형철은 영상예술로서의 미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차라리 문학적 텍스트로 읽히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오이디푸스 신화라는 프레임으로 분석했다. 신해욱은 스웨덴 영화 ‘렛미인’이 원작소설과는 달리 소아성애자 호칸의 이력과 비참한 말로를 생략함으로써 얻은 효과에 주목했다. 영상은 글보다 생생하기에 오히려 비극을 오롯이 담아내기 힘들고, 글은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창조하나 곳곳의 빈틈을 메울 수 없다. 영화와 문학의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고 껴안는’ 작업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