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거대한 자연 앞에 벌거벗고 서다

입력 2011-03-17 18:17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地震·雷·火事·親父)’는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네 가지다. 각각 지진 벼락 화재 아버지를 뜻한다. 앞의 셋은 재해인데 비해 네 번째로 등장하는 오야지는 좀 뜬금없다. 가부장시대 주인공이 슬쩍 끼어 붙은 게 아닐까 싶다.

조금 다른 견해도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단가(短歌) 어조인 5·7·5·7·7음절을 맞춘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신·가미나리’가 7음절이고 ‘가지·오야지’가 5음절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오야지가 야마지(山風), 즉 태풍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게 되면 넷 모두가 재해를 가리킨다.

일본에서 으뜸으로 두려운 것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재해, 특히 자연재해는 두려운 존재였다. 자연재해가 그들의 삶 중심을 좌우했으며 이를 거스를 경우 치러야 할 몫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오야지를 태풍이라고 보는 견해는 자연재해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으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을 봐도 그렇다. 대지진의 후폭풍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망·실종자의 전모가 파악되지도 않았으며 피해지역이 정상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16일 취재차 도쿄에 들어와 일본의 지인들에게 두루 안부전화를 했다. 대부분이 도쿄 부근에 살고 있어 다친 이는 없었고 지진으로 집안 가구가 깨져나갔거나 책장이 쏟아져 내려와 아수라장이 된 경험은 비슷했다. 사상·실종자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피해는 미미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야 적잖은 충격이었을 터다.

충격은 이어지고 있다. 계속되는 여진 때문이다. 15일엔 도쿄 남서부의 시즈오카(靜岡)현 앞바다에서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했고, 16일엔 필자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오랜만에 환영이라도 하듯 덮쳐온 지진은 도쿄 동북 인근의 이바라키(茨城)현 앞바다 속이 진원이었다. 그 밖의 작은 지진은 수시로 다녀간다. 그런 탓인지 한 친구는 하도 많이 흔들리고 있어서 이젠 별 느낌도 없다고 했다. 시큰둥한 반응인 듯했지만 지진에 몸을 자연스럽게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지진 이상으로 다른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바로 방사성 물질 노출이었다.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란 표현은 이제 ‘다이지신 쓰나미 겐파쓰(大地震·津波·原發)’로 바꿔야 본래 의미에 더욱 걸맞겠다고 했더니 그는 크게 맞장구를 쳤다. 다이지신은 5음절인데다 쓰나미·겐파쓰는 7음절이니 5·7조로 어울리기도 한다. 겐파쓰는 원자력발전소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사실 대지진에 이어 제트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쓰나미는 인명피해의 가장 큰 직접 원인이었다. 날로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후쿠시마(福島) 원전 폭발의 공포는 가위 기존의 두려운 존재들을 웃도는 것이다. 물론 대지진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파괴력을 갖는다. 원전이 폭발 위기에 직면한 가장 큰 원인은 지진으로 인해 냉각장치의 동력인 전기공급이 끊긴 데 있었으니 말이다.

‘지진-쓰나미-원전’공포를 넘어

하지만 더 큰 위협은 쓰나미, 그리고 원전 사고였음이 확인됐다. 요미우리신문 보도에 따르면 도쿄전력은 지진으로 파손된 전력공급설비를 새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그로써 수습될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제 원전은 또 다른 공포로 부상했다. 그 와중에 피신이 본격화됐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도쿄사무실은 엊그제 오사카(大阪)로 옮겨갔다.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후쿠시마에서 가급적 멀리 가려는 사람들이 넘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사태 수습을 염원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일본의 아픔이 가슴 깊이 저며 온다. ‘화이토 쟈판(Fight Japan)!’

조용래 논설위원 도쿄=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