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순만] 한국인 다시보기
입력 2011-03-17 18:10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도, 도시바 5억, 소니 3억+라디오 3만대, 파나소닉 3억+라디오 1만대+손전등 1만개+배터리 50만개, 씨티은행 1억, 노무라증권 1억, (…) 욘사마 7300만, 아그네스 종이학….
지난 15일 오후 한 일본인이 인터넷에 띄운 리스트다. 당시까지의 성금 내역을 자세히 나열한 이 메모는 후쿠시마 원전 2호기가 폭발했음에도 여유와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도로 성원했고, 어떤 어떤 기업체는 얼마 얼마씩을, 욘사마 배용준은 7300만엔을, 아그네스라는 누군가는 종이학으로 일본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마음을 보탰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의 유력 언론들이 재난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의 침착함과 질서에 극찬을 보냈지만,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이렇게 산뜻한 맛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작가들의 팬 사이트에 아프리카나 중남미같이 먼 곳의 독자들이 ‘당신이 있어 일본이 좋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사고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내색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절제가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못지않게 돋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인들이다. 일본이 겪는 어려움 앞에서 한국인들은 범국민적이라고 할 만큼 대대적으로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6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학살을 당했다. 1차 대전 후 경제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일본은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난 지진의 혼란상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죄 없는 한국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한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난관을 극복한 일본은 그후 제대로 사과하거나 배상 한번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일본 지진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을 돕는 데 어느 나라보다 열성을 보인다. 세계의 유력 언론은 이 점도 함께 보도해야 하지 않을까.
지진과 해일 속에서 살아난 한 일본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이가 나빴던 이웃을 찾아가 과거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것이었다고 한다. 최근 한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거짓을 해결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졸렬한 삶인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은 한국에 대해 풀어야 할 것이 있다.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