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 경교는 정말 한국에 들어왔었나
입력 2011-03-17 17:38
경교, 8세기경 통일신라에 전래됐었다
1625년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커다란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예수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가 회교도의 집에서 발견했다는 이 비석은 높이(碑身)가 1.97m이고 머리까지 합치면 2.77m에 달하고, 폭 0.9m, 두께 0.3m, 무게는 거의 2t에 육박하는 커다란 비석이었다. 이 비석이 네스토리우스교, 곧 경교의 중국 전래를 입증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였다. 이 비석은 635년 중국에 경교가 전래된 때부터 비문이 새겨진 781년까지 중국에서 기독교의 전파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데, 중국에 전파된 경교는 845년 회창법란(會昌法亂)으로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기까지 약 200년간 활발히 퍼져나갔다.
본래 경교란 네스토리우스(Nestorius·?∼451)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안디옥 근처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안디옥학파의 데오도(Theodore of Mopsuestia) 밑에서 사숙한 그는 428년 동로마 제국의 총주교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마리아를 신모(神母·theotokos)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한 일에서 비롯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만 가졌다는 소위 일성론자(一性論者)들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 곧 두 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마치 그리스도가 두 인격을 가지고 있는 듯한 교의를 주장했다 하여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Cyli·376∼444)의 공격을 받고 이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를 따르던 무리는 별도의 교회를 형성하였고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숱한 박해를 견디며 페르시아의 에데사(Edessa·현재 터키 동남부의 우르파)와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래되었는데 이때가 635년이었다. 중국에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파사교(波斯敎), 메시아교(彌施訶敎) 등으로 불리다가 현종대(代)에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의 경교(景敎)로 불리게 된 것이다.
638년 7월에는 당태종의 칙령에 따라 당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경교의 예배당인 대진사(大秦寺), 혹은 파사사(波斯寺)가 건립되기도 했다. 781년에는 경교의 중국 포교를 기념하여 당의 수도인 장안의 대진사 경내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졌다. 회교의 탄압으로 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이 비가 명나라 말기인 1625년 발견된 것이다. 이로써 놀라운 전파력으로 동방으로 전개된 기독교가 중국에까지 유입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845년 탄압을 받기까지 200년간은 유지되었으나 황소(黃巢)의난(878) 등 일련의 소요에 휘말려 중원에서 거의 멸절되고, 잔존 세력이 몽골과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중국에 전파된 경교가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을까? 이 점을 언급하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경교의 신라시대(羅代) 전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E A Gorden)이었다.
당나라에 경교가 활발하게 전파될 당시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초기였는데 통일신라는 친당(親唐)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수입하고 있었고, 신라인들이 당에 유학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해상 무역이 일본이나 중국의 범위를 넘어 서역까지 확대되었던 점, 그리고 한국불교 문화 속에 나타난 경교의 유입 영향을 근거로 당에서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래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확신에서 고든 여사는 중국서 발견된 비와 동일한 모조비를 1906년 5월에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경교의 나대 전래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석제(石製)십자가(Stone cross, 24.5×24×9㎝)와 2점의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Cross-based design, 5.8×5.6㎝, 2.4×3.2㎝), 그리고 마리아소상(塑像·Statue of virgin Mary, 7.2×3.8×2.8㎝)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자료였다. 이런 기독교적 흔적들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제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그리스형 십자가로 불리는데 중국에서 발견된 형태와 동일하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추정되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양선은 석제 십자가의 발견을 통해서도 경교의 나대 전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재일 교회사학자였던 오윤태는 경교의 나대 전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하였고, 자신의 ‘한국기독교사, 경교사편’(혜선문화사, 1974)을 통해 이 점을 논증하였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적어도 8세기에 경교는 한국에 소개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적어도 1200년 전 한반도에 자리를 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이상규 (고신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