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0)] 3년만에 “아시아의 칸” 찬사 쏟아져
입력 2011-03-17 17:56
1998년은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해에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부산프로모션 플랜’(PPP)은 영화제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가 됐습니다. PPP는 로테르담영화제의 ‘시네마트’를 벤치마킹해 우리 것으로 리모델링한 작품입니다. 97년 1월 로테르담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갔을 때 시네마트를 보고 ‘바로 이거다’ 했습니다. 시네마트는 세계에서 선정한 영화 40여 편의 제작기획자들을 투자자들과 만나도록 주선하는 ‘영화시장’입니다. 돈이 없어 영화를 못 만드는 아시아 감독들을 위해 부산영화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산프로모션 플랜의 창설은 박광수 부위원장이 폴 이와 함께 주도했습니다. 97년 2회 영화제 때 전문가들을 초청해 ‘PPP97’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개막영화 ‘차이니스 박스’를 들고 온 웨인 왕 감독 등이 주제발표를 했습니다.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 홍콩 등 5개국 자본으로 제작된 ‘차이니스 박스’ 사례를 듣고, 공동제작 및 투자에 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98년 2월 2일 로테르담영화제에서 PPP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고, PPP와 시네마트의 자매결연도 맺었습니다.
처음 열린 PPP는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중국의 티엔 주앙주앙, 일본의 이시이 소고, 한국의 김수용, 박기용 등의 영화 프로젝트 16편이 소개됐고, 네덜란드의 포르티시모, 미국의 20세기 폭스 인터내셔널 등 세계 각지의 투자·배급 관계자 290여명이 참가해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IMF로 아시아 각국이 경제위기를 겪을 때, 아시아 감독들에게 영화제작의 활로를 터주는 ‘적시 안타’였습니다.
98년은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도 새로운 역사를 기록한 해였습니다. 5월 칸영화제에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강원도의 힘’(홍상수) ‘스케이트’(조은령, 단편경쟁) 등 4편이 초청된 것이죠. 97년까지 칸영화제 50년 역사에서 한국영화는 ‘물레야 물레야’(이두용·1984)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준·1989) ‘징발’(신상옥·1994) ‘유리’(양윤호·1996) ‘내안에 우는 바람’(전수일·1997) 등 5편만 상영됐을 뿐입니다. 그만큼 칸과 한국영화 사이에는 두터운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셈입니다.
이 해부터 한국영화는 매년 4∼5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50년에 5편이었는데 매년 4편이 소개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 2000년 ‘춘향뎐’(임권택)이 사상 처음 칸의 경쟁부문에 올랐고, 2002년 ‘취화선’(임권택)이 감독상을, 2004년 ‘올드보이’(박찬욱)가 그랑프리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98년은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에 물꼬를 튼 해였고,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창구 역할을 한 것입니다.
8일간(9월 24일∼10월 1일) 개최된 제3회 영화제에는 41개국 211편이 초청됐고, 19만2000명이 관람했습니다.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고요’가 개막영화로,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간장선생’이 폐막작으로 상영됐습니다. 중국 지아장커 감독의 첫 영화 ‘소무’가 최우수아시아영화작가상을 받았습니다. ‘소무’는 세계 영화제를 순회하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지아장커 감독은 제1회 PPP에도 차기 프로젝트 ‘플랫폼’을 발표했고, 이 영화는 2000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2006년 ‘스틸 라이프’로 그는 베니스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쥡니다. 부산이 발굴한 세계적 거장감독의 대표 사례입니다.
일본영화 수입이 금지됐던 시기에 제1회 영화제에서 ‘동경의 추억’(츠카모토 신야) 등 15편, 제2회 영화제에서 ‘하나비’(키타노 타케시) 등 17편, 제3회 영화제에서 폐막영화를 포함해 ‘사후’(코레에다 히로카츠) 등 28편의 일본영화가 상영돼 부산국제영화제는 일본영화 개방을 앞당기고 한·일 영화교류를 트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영화는 99년부터 개방됐습니다.
영화제 기간 중인 9월 26일, 저는 남포동 극장에서 경쟁부문인 뉴커런츠에 선정된 ‘소무’의 지아장커 감독을 소개한 후 해운대 요트경기장 야외무대에서 프랑스대사를 포함한 프랑스 감독과 배우를 소개해야 했습니다. 그 간격은 40분뿐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택배회사에 전화해 택배오토바이 뒤에 짐 대신 제가 올라타고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달려갔습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이날 이후 3∼4년간 택배오토바이는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제 전용 교통수단이 됐습니다.
영화제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후유증은 있게 마련입니다. 첫 영화제가 실패했다면 저는 책임지고 물러났을 것이고, 영화제 또한 1회로 끝나거나 작은 영화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겠지요. 다행히 영화제는 성공했지만,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는 한동안 ‘텃세’ 또는 ‘지역주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영화제가 성공하면서 ‘왜 서울사람들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느냐’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2회 영화제마저 성공하자, 부산의 일부 언론과 영화계에서 이런 여론은 표면화됐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3년만 하고 물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시장을 통해서 ‘프로그래머’ 인사 청탁도 들어왔습니다. “아시아영화를 선정하자면 1년에 500편 이상 영화를 봐야 하는데 한 사람 가지고 되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 책임지고 선정해야만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영화제를 창설한 이용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마저 1회 영화제가 끝난 후 사퇴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밤새 소주 마시며 만류했고, 그는 고집하다 번복하기를 몇 번 한 끝에 사퇴를 포기했습니다. 95년까지 15년 동안 부산 경성대학교 영화과 교수를 역임했던 그는 부산의 영화계 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영화 선정 및 영화제 운영과 관련해 ‘지역정서’에 시달리며 어지간히 갈등을 겪은 것 같았습니다.
제2회 영화제가 끝난 후 11월 4일, 저는 부산 언론인과 대학교수 등 문화계 인사로 구성된 ‘신사고포럼’에서 제1회 ‘올해의 부산인 상’을 받았습니다. 격론 끝에 부산사람은 아니지만 첫 번째 수상자로 결정하는 것이 오히려 ‘신사고’ 정신에 맞는다는 논리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수상은 부산의 언론과 문화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저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습니다.
제3회 영화제가 막을 내리자 외신들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의 칸’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2일자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부산국제영화제의 화려한 개막식은 이 8일간의 행사가 아시아의 칸으로 발돋움하는 서막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부산영화제는 불과 3년 만에 아시아의 영화 행사 중 가장 중요한, 가장 의욕에 찬 행사가 됐다’고 보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