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핵 사용으로 인류를 끝장낼 작정인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입력 2011-03-17 17:24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버트런드 러셀/비아북

지난 11일 일본 동북부 해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원전들이 연쇄폭발하고 방사능이 유출되면서 일본 전역이 핵 공포에 떨고 있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증오의 산물로 등장한 핵은 2차 세계대전에서 참혹한 참상을 만들어냈다. 핵은 발전(發電)이란 측면에서 인류 문명 유지에 중요한 수단이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위협이기도 하다. 이미 반세기 전에 핵의 무분별한 사용을 경고한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다.

1955년 7월 9일 당시 83세였던 러셀은 스위스 제네바 4개국 정상회담 직전 전 세계 기자들 앞에서 핵의 무분별한 사용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며 “인류를 끝장낼 작정입니까?”라고 외쳤다. 러셀이 작성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서명한 성명서에는 핵무기를 동원한 전쟁이 초래하게 될 재앙을 경고하고, 국가간 분쟁을 야기하는 모든 문제를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신간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40여편에 이르는 러셀의 저서와 소론, 기고문, 연설문 등에서 가장 ‘러셀다운’ 명문들을 가려 모은 것으로, 인류의 진보에 필요한 개인의 창의성과 생존에 필요한 사회적 결속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를 탐구한 결과의 집합체다. 러셀 전문가인 로버트 E 에그너 미 셀비스테이트대 교수가 58년 ‘버트런드 러셀의 베스트’라는 제목으로 펴낸 원서는 이후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꾸준히 개정돼 왔다. 국내에서는 전문 번역가인 이순희씨가 우리말로 옮긴 것에 박병철 부산외대 교수가 정치와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 등 6개 큰 주제로 묶은 뒤 각 장에 해설을 덧붙여 출간됐다.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20세기 위대한 지성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러셀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100년에 가까운 생애 동안 70여권 이상의 책을 펴낸 분석철학의 창시자였고 합리적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논리학과 수학기초론, 인식론, 존재론 등 현대 논리학의 틀을 세운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시대 총리를 지낸 할아버지 존 러셀의 덕택으로 작위를 세습해 영국 상원의원이 된 정치인인 동시에 네 번의 결혼과 수많은 연애사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자유연애주의자였다. 진보 지식인이었던 러셀은 특히 1차 세계대전 중 징집반대 운동에 나서거나 반핵운동에 나서는 등 권위적인 제도와 억압에 저항한 용감하고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나는 최신형 핵폭탄이 방사능 낙진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그것은 모두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한 방송 토론에 참석했다. 미국 정부의 고위급 핵 전문가가 나와서 자신은 ‘방사능이 없는’ 폭탄 제조법을 발견했으며, 자신이 이런 연구를 한 것은 인도주의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내가 물었다. ‘그러면 소련에도 그 사실을 알리는 게 어떨까요?’ 그는 기겁하며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건 불법행위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소련인들의 목숨만 구하고 싶어 하고, 미국인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50∼51쪽, ‘친애하는 버트런드 러셀’ 중, 1969년)

기득권의 부조리를 겨냥한 러셀은 한 때 미국 법정에서 ‘외설 작가’라거나 ‘인간계에 보내진 악마의 종복’이라는 인신공격에 시달렸지만 45년에 쓴 ‘서양철학사’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후 유려하고 명쾌한 문체로 인류애적 이상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에는 러셀이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2차 세계대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런 인식을 갖게 한 배경임은 물론이다.

“축구팀이 사이좋게 서로 한 골씩 넣는 식으로 협력하기로 했다면 어느 편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운동 경기 뿐만 아니라 팀이나 지역, 조직간 경쟁은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패자에게 가해지는 벌칙은 전쟁에서 패한 편에게 가해지는 것과 같은 끔찍한 재앙이 아니라 영예의 실추에 그쳐야 한다. 패한 팀을 학살하거나 굶주리게 하는 것이 축구경기의 규칙이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스포츠가 아니다.”(38쪽. ‘권위와 개인’ 중, 1949년)

50년 ‘환영받지 못하는 에세이’라는 책을 펴낸 것에서 엿볼 수 있듯 러셀은 당시 사회 통념상 금기시됐던 여성 참정권이나 종교 등 당대 기득권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들도 주저 없이 다룬다. 그는 98세이던 70년 1월 이스라엘이 3년 전 6일 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며칠 만에 숨을 거두었다. 방대한 그의 저술에서 명문장만 따로 모은 책인 만큼 러셀의 진가를 모두 헤아리기엔 부족한 감이 있지만 거장의 지적 탐구열과 인류를 향한 순수한 애정을 확인하기엔 충분하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