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너무 다른 일본 재난보도, ‘차분한 NHK’ 배우자는데… 동의하십니까?
입력 2011-03-17 20:40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1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쿄의 14개 신문사 중 10곳의 사옥이 불에 타 신문 인쇄가 불가능해졌다.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기 전이라 언론은 신문이 유일했다. 한 달간 ‘언론 공백’ 상태가 지속됐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화재는 조선인들의 방화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와 결탁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등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언론은 무력했다.
지난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우리가 보고 있는 일본 NHK 재난방송. 멀리는 관동대지진의 경험, 가까이는 95년 한신대지진의 교훈을 토대로 조금씩 축적해 온 결과물이다.
‘미야기(宮城)현 북부에 진도 7.’
11일 오후 2시47분30초. NHK는 긴급 자막을 내보냈다. 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1분30초 만이다. 평소 연습한 매뉴얼대로였다. ‘NHK 재난보도 매뉴얼’에는 지진 발생 2분 안에 기상청 1보가 방송국에 도착하고, 10초 안에 재난방송이 시작된다고 돼 있다.
진도 5 이상일 경우 방송 원고를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장비도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기상청 긴급정보는 방송용 대본이 돼 프롬프터에 뜬다. 재난 현장에선 1초에도 생사가 갈린다. 이번에도 이 장비가 원고 쓰는 시간을 아껴줬다.
‘NHK 재난보도 매뉴얼’은 대외비지만 국내엔 이 매뉴얼을 궁금해하는 학자들이 꽤 있다. 이 기사는 그들이 입수한 매뉴얼 중 ‘NHK 포케토 사전 2007’이란 제목이 붙은 것을 토대로 했다. 부족한 부분은 이토 료지 NHK 서울지국장, 이연 한국재난정보미디어포럼 회장을 인터뷰해 재구성했다.
경험을 토대로 했기에 매뉴얼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지진, 해일, 태풍 등 재해 종류별로 작성된 매뉴얼에는 취재기자를 위한 조언이 빼곡히 담겨 있다. 선배 기자들이 재난 취재 경험을 글로 남긴 ‘족보’인 셈이다.
‘재해가 일어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을 너무 괴롭히지 말라. 그들의 가족도 피해자일 수 있다.’ ‘붕괴된 건물이라도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소유주가 있다.’ ‘심하다, 매섭다, ∼같다, 내가 느끼는 진도는 얼마다 같은 주관적 표현은 쓰지 말라.’ ‘강한 지진이란 표현까지는 용인된다.’ ‘방송 앵커와 기자는 헬멧을 착용하고 보도하라.’
재난보도는 속보보다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신념도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2일 오전 10시, NHK는 “사망·부상자 1000명 초과”라고 보도했다. 같은 시각 한국에선 “1100명”이란 숫자가 전파를 탔다. NHK는 추가 사상자가 공식 확인된 오전 11시에야 “1300명 초과”라고 전했다. NHK 보도에선 ‘혼란을 야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한국 언론에선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한다’는 의욕이 읽힌다.
NHK 재난방송 화면을 보자. 윗부분엔 ‘후쿠시마 대지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사망자 ○○명, 행방불명자 ○○명’이란 자막이 흐른다. 왼편엔 교통·식수·정전 등 생활정보가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우측 아래 일본 지도에는 어느 지역에 주의보·경보가 발령됐는지 표시된다.
화면을 예쁘게 꾸미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보 전달에 집중한다. 시각·청각 장애인도 감안한 화면 구성이다. 88년 4월부터 중요한 정보는 영어로도 방송하고 있다.
경험에서 배우려는 일본의 자세는 언론사 취재헬기 사양까지 바꿨다. 95년 한신대지진 때 재난현장 상공을 비행하는 취재헬기 소음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소리가 구조대에 전달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매뉴얼은 취재헬기 고도를 300m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NHK는 더 높은 고도에서 시끄럽지 않게 촬영하기 위해 소형이던 헬기를 모두 중형으로 교체했다. 헬기에 소음을 줄이는 방음장치까지 설치했다.
NHK는 준(準)기상청
일본 언론사들이 재해에 대처하는 자세도 남다르다. NHK는 준기상청이다. 보도국 안에 기상재해센터가 있다. 50여명이 3교대로 24시간 근무한다. 센터장의 힘은 막강해서 생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편성할 권한이 있다.
기상청이 발표한 지진·해일 데이터는 통신회선을 통해 NHK에 전달된다. 컴퓨터가 지진규모, 해일화면, 해일도달 예상화면 등을 자동으로 만든다. 만에 하나 기상청 지진계가 고장 날 경우에 대비해 NHK 기상재해센터는 전국에 자체 지진계 70여개를 보유하고 있다.
NHK 지역방송국은 250개가 넘는다. 모든 지역방송국 2층 옥상에 기온 습도 온도 등을 측정하는 자동기상측정기가 설치돼 있다. 정보는 NHK 기상재해센터로 실시간 전송된다. 기상 캐스터도 모두 기상예보사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이연 회장은 “NHK는 재해를 비판적 시각에서 보도하지 않는다. 재난이 생기면 자신을 방재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빠른 시간 안에 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방송한다”고 말했다.
9월 1일은 일본 방재의 날이다. NHK를 비롯해 도쿄의 모든 신문·방송사가 재해 발생시 신문발행과 뉴스제작 훈련을 한다. 비상연락망을 통한 직원 소집,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출근, 호외발행, 재해방송 제작 등을 반복해 연습한다. NHK 본사의 재난보도 책임자들은 비상시 달려올 수 있도록 회사에서 반경 5㎞ 안에 살아야 한다는 규정까지 있다.
요미우리신문도 ‘지진재해 취재매뉴얼’을 만들어 매년 대규모 훈련을 한다. 교통마비 상황을 가정해 사진기자가 자전거로 출근하며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로 송고하는 연습을 하는 식이다. 심지어 전화망 단절에 대비해 방송사 중계차들이 갖고 있는 위성 송수신 시스템(SNG·Satellite News Gathering)까지 갖추고 있다. 요미우리신문 본사 지하 100m 지점에는 마그마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탐지기도 있다.
NHK와 KBS
#1. 동일본 대지진 6일째인 16일. 센다이엔 아무것도 없다. 편의점마다 식품이 품절됐다. 거리 곳곳의 자판기는 사흘 전에 이미 맥주만 남고 다 팔렸는데, 지금은 맥주마저 동났다. 센다이에 특파된 본보 최승욱 기자는 일본인 20여명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상황이 이런데 구호품을 제때 보내주지 않는 정부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돌아온 답변은 신기하리만큼 비슷했다. “불만은 없다. 국가위기 상황이니까. 정부 방침을 잘 따르는 수밖에 없다.”
센다이 택시기사 카사이 타츠오(58)씨는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전쟁은 나쁘다고 배우며 자란다. 어른이 되면 싸움이나 갈등은 무조건 나쁜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속으로 불평할지는 몰라도 밖으론 절대 표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NHK 재난방송은 이런 이재민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①앵커는 조용하게 사무적으로 말했고 ②울부짖는 피해자 모습을 화면에 보여주지 않았다. ③사망자 숫자는 보수적으로 집계한 반면 ④구조작전을 상세히 보도했고 ⑤정부 발표를 충실하게 전했다. ⑥원전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 닷새 동안은 책임자를 탓하는 보도가 없었다.
#2.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이 서해 연평도를 포격했다. 주민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바로 다음날 주민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들은 군청을 찾아 항의하기 시작했다.
“꽃게잡이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데 어업 보상은 어떻게 할 거냐.” “5평짜리 임시주택에서 언제까지 살라는 거냐.” “이주대책을 마련하라.”
‘천재지변’과 ‘포탄공격’을 대등하게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당시 KBS 보도는 NHK와 달랐다. 피격 다음날부터 사태의 책임 소재를 파헤쳤고, 사망자와 피난민의 안타까운 사연을 적극 발굴했다. 국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두 나라 ‘스타일’은 정반대다. 이쪽의 장점이 저쪽에선 단점이다. 한국에선 재난이 닥치면 언론과 이재민의 아우성에 떠들썩해진 대신 뭐가 필요한지 정부에 신속히 전달되고 그만큼 조치도 빠르다. 언론과 이재민 모두 조용한 일본은 지진현장에 아직도 구호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지만 무질서나 혼란은 찾아볼 수 없다.
13일 오전 9시30분, NHK 프로그램에 각 정당의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이 출연해 토론을 벌였다. 사회민주당 당수가 말했다. “일본의 안전신화가 무너졌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원전 폭발 장면을 왜 TV에선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가. 너무 감추는 것 아니냐.”
일본에서 이런 비판 목소리는 서서히 커지고 있다. 원전이 안전하다던 정부가 자꾸 말을 바꾼 탓이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15일 “정부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가 불신으로 변하고 있다. 침착하던 국민들 사이에 공포가 자라면서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NHK가 KBS처럼 처음부터 비판의 날을 세웠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재난 상황에 아주 침착한 일본 언론과 아주 시끄러운 한국 언론, 어느 쪽이 최선인가? 그것은 확실한가?
김원철 최승욱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