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강원도 철원군 서면 김정숙 할머니

입력 2011-03-16 19:17


“두 남편 먼저 보내고 여적 이렇게 살지요”

김정숙(86) 할머니는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었다. 강원도 인제에 살면서 피난 갈 새도 없었다. 아군이 오면 아군에게, 적군이 닥치면 적군에게 밥을 해냈다. “(총을) 쏜다, 쏜다”는 위협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몰랐다. 그게 무서워 나중에는 산속 동굴에 숨었다. 단지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이닥친 연합군의 선발대는 “빨치산을 어디에 숨겼냐”며 전기고문을 했다.

한 여성으로서의 삶도 기구했다. 할머니는 15살에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재혼해 아들 둘을 더 낳았지만 재혼한 남편도 병사했다. 아이 셋과 홀로 남았다. 가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막막함은 전화위복이 됐다. 예수를 만났다. 김 할머니 막내 박종태(비전북 대표)씨는 “어머니가 엄청난 유산 두 가지를 물려주셨다”면서 “하나는 근검절약을 가르쳐준 가난이요, 더 소중한 다른 하나는 신앙”이라고 말했다.

“빨치산 어디 숨겼냐” 전기고문

한국전쟁 때였어요. 우린 뒷산 굴속에 숨어 있었어. 인기척이 나서 숨을 죽이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굴속으로 총구가 들어온 거야. 그리고 손을 들라는 거야. 나오라고 해서 나왔지요. 세우더라고. 한 사람 한 사람 조사를 했지. 막사로 끌고 와 쭉 앉혀놓고 한사람씩 불렀어. 막 때리는 소리가 나서 무서웠어. 남자들은 더 때리고 여자들은 덜 때린 것 같아.

내 차례가 왔어. 바로 말하래. 뭘 말해. 우린 피난 못가고 무서워서 숨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 마구 때리더라고, 전기 찜질<전기 고문>도 했어. 저만치 앉혀 놓고 전화기 같은 것을 돌리면 몸에 전기가 찌륵찌륵 왔어. 몸이 오그라들면서 앞으로 고꾸라지면 다시 몸을 떠밀고 바로 말하라고 했어. 우린 그 말만 했어요. “빨치산 아니다. 산 속이라 아군들이 온 줄 몰랐다.” 그러면 다시 또 때리고, 전기 찜질을 했어. 또 물어 “빨치산 어디다 숨겼냐”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해. 우린 빨치산이 아닌데.

며칠동안 고문했어. 그러더니 집에 데려다 주더라고. 정보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그냥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사람 다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인지. 난 한 달 동안 꼼짝도 못했어. 어떤 이들은 개를 삶아서 찜질(민간요법인 듯하다)했대. 붙들려 간 게 한 일곱 집인가 그랬어. 지금 허리 아픈 게 그때 그래서 그런 것 같아. 고문당한 것은 애들한테 말한 적 없어요. 무슨 좋은 일이라고.

총구를 겨누고 먹을 것 달라고

전쟁은 강원도 인제에서 치렀어요. 마루 지저분한 것 치우고 있는데, 앞산에서 시꺼먼 것이 한 줄로 내려오는 거야.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지. 마당을 쓸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뭔 보따리를 이고 지고 한 패가 지나가더라고. 보니까 피난민이야. 우린 일단 뒷산에 숨었지. 생각해보니까 안 되겠어. 그래서 짐을 싸 남으로 향한 거야. 그런데 내려가다 보니 북한군이 앞서 있는 거야. 그래서 다시 마들로 돌아왔어. 피난도 못 간 거야.

그때 죽지 않은 게 용해. 북한군은 북한군대로, 아군<연합군>은 아군대로 먹을 것 내놓으라고 총구를 겨누고 무서웠어. 안 주면 “쏜다, 쏜다” 하면서 진짜 사람을 앞에 두고 옆에 총을 쏘기도 하고. 먹을 것 주면 놔두고. 동네에 있는 소는 다 잡아 먹었어. 소를 먹는데 소금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때는 소금이 귀했어. 그러면 소금 안 내놓는다고 총질을 하고 그랬어. 북한군한테, 아군한테 양쪽에 다 시달렸어. 그러다가 막판에 산 속에 숨은 거예요.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지. (북한) 비행기가 떠도 무서운지 몰랐어. 갑자기 ‘쌕’하고 뭔가 날아오더니 저쪽 동네에 불을 뿜는 거야. 그래도 다행은 우리 가족 중에는 전쟁 통에 죽은 사람은 없어.

왜정 때는 워낙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해. 결혼하고 남편 따라서 함경도에 살았어요. 총각 때 거기서 일을 했나봐. 같이 가서 비료공장, 간장공장, 된장 공장도 다녔어. 연탄을 피우고 했는데, 석탄을 한 마차 실어다 주면 물로 개서 말렸다가 땠어.

8·15 해방되고 나오려고 했는데 금방 나올 수가 없었어. 어수선하니까 9월 말에야 이남으로 나오려 했지. 사람들이 못 가게 하더라고. 나는 친정집 양양 간다고 해서 나왔고, 남편은 밤에 몰래 넘어왔지. 홍천에 자리를 잡았어요.

두 남편 복막염으로… 천식으로…

나도요, 시방지금 여기서 다 얘기하고 싶은데… 팔자가 드세요. 두 번 결혼했어요. 첫 번째 남편은 첫째 애 네 살 때 복막염에 걸려서 세상을 떴어요. 그때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팔자 고치라고요. 준애비<중매쟁이>가 자꾸 “국수 먹읍시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할 때잖아요. 첫 번째 남편 때도 그랬고 두 번째도 그랬어요. 밥은 먹고 살겠지 했어요. 막상 집에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땅 한 평 없고, 집이라고 해 봐야 땅은 남의 것이고 작은 집만 있는 거예요.

그 작은 방에서 남편 등지고 자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져.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은 것이. 장작불을 때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눈물만 쏟아졌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 살아야지.

양구가 좋다고 해서 글리<그리> 갔어. 그런데 애 아버지가 해수병천식에 걸렸네. 2년은 거동이라도 했는데, 2년은 완전히 누워만 있었지요. 그러다 세상을 떴어. 철원으로 온 그해 10월이던가. 큰애 열여덟 살, 둘째 여덟 살, 막내 두 살 때였어. 그리고 여적<이제까지> 이렇게 사는 거지.

“보리밥 좀 실컷 먹어봤으면”

그때 남편 세상 뜨니까. 저거 어떻게든 굶기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뿐이었지. 하루는 막내가 그러더라고 “보리밥 좀 실컷 먹어봤으면” 매일 옥수수밥만 먹었어요. 옥수수를 말려서 맷돌에 갈아 채로 쳐요. 가루하고 중간치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해. 맨 위 굵은 것으로 밥하면 목에서 안 넘어가요.

큰애도 그렇고 둘째는 머리가 좋았는데 초등학교만 졸업했어. 막내는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지<자기> 형이 군대 가는 바람에 1년을 쉬었지. 집에 누군가는 있어야 했으니까. 어렸어도 어른들과 똑같이 농사짓고 소여물 먹이고 다 했어. 그러다가 직업학교 갔고, 취직해서도 서울야간 공고를 다녔어. 새벽에도 공부하고 밤에도 공부했지. 방통대라는 곳도 다니고 그 어려운데 지가 알아서 살았어. 지금은 출판사 하니까 잘 된 거지. 큰애는 원주 살고, 둘째는 의정부에서 건설기계 일하고. 그래도 다 잘 살았어.

그런데도 늘 미안하지. 한번은 막내 춘천 직업훈련원 다닐 때야. 방학 때 들렀는데 새벽에 일 나가다 보니까. 운동화가 다 떨어진 거야. 아이고, 한참을 울었네.

전염병인 장티푸스 기도로 고쳐

그런 적도 있었어. 둘째가 열여덟 살 먹어서 아팠어요. 몸에 이상한 게 도틀도틀 돋고, 빨갛게 변했는데,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안 들어요. 보름 입원했는데 집에 가라는 거예요. 약도 안주고, 먹고 싶은 거나 실컷 사 먹이래요. 그게 염병이라고 불리던 장티푸스였어요. 치료약도 없었고. 약을 안주니까 서운하대요. 그때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 “괜찮아. 하나님이 다 고쳐주실거야.”

그리고 이튿날 교회에서 심방을 왔어요.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둘째가 누워서 그랬어요. 찬송소리 들으니까 기운이 난다고요. 그러니까 김옥녀 권사님이 그럼 날마다 와서 기도해주랴 그랬어요. 둘째가 그러라고 하대요. 그 소리 듣고 한 달간 작정기도를 했어요. 그랬더니 병이 나았어요. 병만 나은 게 아니라 교회가 막 부흥을 하더라고요.

병은 심각했어요. 보건소 직원들이 와서 집 주위를 새끼줄로 둘렀어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요. 보건 직원들이 어쩌다 한번 오면 방에 가마니를 깔고 신발 싣고 왔다가 금방 갔어요.

그런데도 교인들은 전염을 걱정하지 않고 계속 와서 기도했어요. 실제 전염된 사람도 없었고요.

교회 다니는 여자들 부러웠지

김옥녀 권사님하고 박경옥 속장님, 그런 분들이 없어요. 남편 죽었을 때 그 분들이 많이 도와 줬어요. 먹을 것도 주고 관심도 줬지. 늘 감사했어요. 어떻게 해야 신세를 갚나 생각했지. 그래서 교회에 나갔어. 워낙 그 분들이 교회 가자고 권면했고요.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지. 밭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짐<김>을 매는데, 여자들이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야, 저런 여자들은 무슨 팔자가 좋아 책을 다 만지고 사냐.’

교회는 63년부터 다닌 것 같아. 처음에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와수교회를 다녔어. 이 동네에 교회가 없었거든. 조연환 당시 장로님이 이 동네에 기도처를 만들었지, 그래서 주일 낮예배는 와수교회에 가서 드렸고, 저녁예배 등은 기도처에서 드렸어. 사람들이 막 늘더라고, 기도처가 꽉 찼지. 그래서 교회를 지었어. 그게 신흥교회야.

교회까지 한 3㎞ 됐는데 걸어 다녔어. 교회까지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좋던지. 마음이 든든하고 즐겁고, 자꾸 교회가고 싶고. 소나무 한 짐을 해서 지고 가기도 했어. 그때는 나무를 땔 때에요. 힘들고 무거워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

조 장로님이 찬송가도 주셨어요. 처음에는 찬송가만 갖고 다니다가 나중에 성경책도 생겼지. 내 칠순인가 환갑인가 손자들이 성경책하고 찬송가를 선물로 줬어. 책 표지가 많이 달았는데, 이제 죽을 때까지 써야지 뭐.

방화범이 된 막내

막내가 소외양간 태운 일도 있었네. 큰애 군대 가면서 집에 있던 소를 팔았어요. 키울 사람이 있어야지. 동네 사람이 와서 그 돈을 빌려주라는 거야. 이자를 받으면 된다고 그래서 돈을 줬지. 사실 이자는 제대로 못 받았어. 원금은 받았는데, 그것도 어렵게 받았던 기억이야.

그게 다행이야. 소를 팔았던 것이. 소 안 팔았으면 태워 죽일 뻔했어. 막내가 마구간에 불을 놓아서 홀라당 다 태웠잖아. 장난삼아 성냥을 켰대. 마구간을 둘러싼 짚에 불을 붙여봤는데 불이 확 붙은 거야. 나는 몸이 아파 방에 누워 있었지. 막내가 들어와서 불났다고 하는 거야. 동네사람들 다 불러서 껐어. 불 번질까봐 초가지붕에 멍석을 덮고 물을 뿌리고 했지. 막내 6살 때야.

그러고 보니 막내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 막내는 착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몇 번 사고를 쳤네. 같은 동네의 한 집에서 송아지가 새끼를 낳았어. 신기하니까 애들이 몰려들었지. 막내도 같이 둘러서서 봤대. 막내가 빨간 체크 남방을 입은 게 문제였다나 봐. 소가 새끼를 핥더니 갑자기 달려들더래. 막내가 뿔에 받혀 몇 미터는 날았다지 아마. 복부와 허벅지 사이가 찢어졌는데, 병원에서 조금만 더 위로 갔어도 죽었다고. 그때 그 소 주인이랑 싸웠잖아. 글쎄 병원비를 한번만 댄다는 거야. 애는 다 죽어가게 생겼는데.

우리 목사님 같은 이가 없어

교회는 우리가 지었어. 목수는 다른 교회의 권사님이었어. 그분이 전체적으로 다 맡아서 하고 우리가 벽돌 져 나르고 했어. 애들도 같이. 목사님 어디 가시면 교회와 사택 지키는 것도 내 몫이었지. 신학생 전도사님이 오시면 공부하신다고 집을 비울 때가 많았어. 그럼 누군가 집을 지켜야지. 전도사님이 어디 갔다 온다고 하시면 교회고 사택이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는 거야.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부엌에 고인 물도 퍼내고, 눈 많이 오면 눈도 치우고요.

우리 애들한테는 미안했어. 주의 종 섬긴다고 한 건데, 그때 왜 그렇게 애들보다 전도사님을 챙겼는지 몰라. 밥 먹다가도 맛있는 것 있으면 챙겼다가 드리고 전도사님 오신다고 하면 미리 방에 불을 지펴놓고. 아무튼 그랬네요.

하나님이 그 일을 다 기억하시나 봐요. 지금 목사님이 너무 잘해 주셔. 새벽마다 차로 데려가고 데려오고, 약도 타다 주고, 죽도 끓여주고, 날마다 문안하고. 우리 자식들은 목사님이 오히려 자식 같다고 그래.

우리 목사님 같은 이도 없어요. 교회 안 다니는 동네 사람도 그 목사는 진짜래요. 동네 궂은일은 다 맡아 하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양반 처음 본다고 해요. 계속 계시도록 붙잡아 두라고 그러네.

그래서 내가 가끔 요구르트도 주고 계란도 사주고 해. 요구르트는 가끔씩 봉사단체에서 밥하고 주고가. 노인네가 요구르트 먹는다고 건강해지나. 젊은 목사님이 드셔야지. 계란은 목사님 차타고 시내 가서 사와. 안 가져가신다는 거 극구 우겨서 드리는데 요즘은 힘 안들이시네.

청룡열차, 천당 가는 차 같더라고

우리 아들네가 자꾸 도시 집으로 가자는데. 나는 아파트에서 못 살아요. 애들 다 나가면 혼자 어떻게 하루 종일 있어요. 여기 있으면 교회도 가고 경로당도 가고 이웃집도 가지. 혼자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시니까. 걱정도 없고 마음도 편해.

한번 서울 갔더니 무슨 차가 이리 많던지. 무슨 놀이동산인가 갔더니 차가(청룡열차) 하늘로 올라가더라고. 하늘나라 가는 차인 것 마냥. 가끔 아들 덕에 서울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해. 그렇게 놀러 다니면 되지.

우리 애들한테 그런 것만 강조해요. 주일 잘 지켜라. 기도 열심히 해라. 하여튼 빚지지 마라. 아유, 빚이 호랭이보다 더 무섭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어차피 갚아야 할 돈이니까, 빚 다 갚으면 그 다음 버는 돈은 다 자기 돈이니까, 빚지지 말라는 거지. 나는 암만<아무리> 없어도 빚은 안 졌어. 하루 품을 팔아서라도 벌어서 뭘 샀지. 그것도 하나님 은혜지. 살아보니까 어디 하나님 은혜가 아닌 게 있나.

연보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추리 대나무골에서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남

1941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사는 이순선씨와 혼인

1944년 장남 이흥복씨 출생

1945년 남편 이순선씨 별세

1952년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의 박상희씨와 재혼

1954년 차남 박종혁씨 출생

1960년 막내 박종태씨 출생

1961년 남편 박상희씨 별세

1963년 와수교회 등록

1967년 신흥교회 함께 개척

1995년 권사 취임

신흥교회는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5리에 있는 시골교회다. 1967년 5월 조연환 당시 장로 등이 개척했다. 조 장로는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예배당은 1972년 7월 1일 박현숙 장로(서울 남산교회·전 국회의원)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대지 991.7㎡에 교회 82.6㎡과 주택 52.8㎡이다. 3년 전에 교육관을 세웠다. 현재 교인은 30∼35명, 초등부 아이들이 12명 정도다.

조용태 담임목사는 교회의 자랑으로 믿음의 교인들을 꼽았다. 김정숙 권사가 대표적인 예다. 조 목사는 “목회자로서 최고의 축복은 좋은 성도를 만나는 것”이라면서 “내가 그 복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조 목사는 19대 목회자로 2003년 4월에 부임해 2006년 4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033-458-2314).

철원=정리 전병선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