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이야기] 이웃 위한 사랑과 화평의 노래

입력 2011-03-16 18:03


서양음악학자 그라우트는 “서양 예술의 역사는 기독교 음악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음악의 근본적 발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서양음악사의 전체 내용은 곧 교회음악사라는 것을 역설했다.

창세기 4장21절에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구절로 음악 조상에 대해 언급한다.

또 모세의 노래가 담긴 출애굽기 5장 1∼18절에서는 홍해에서 애굽의 군사에게 전멸당할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과 같이 홍해를 건넌 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로 이어지는 출애굽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노래하는 장면 등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의 체험은 성경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과 신학,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서의 교회음악과의 관계는 사랑이며 서로 닿을 수 없는 수평선상의 동반자적 관계를 갖는다.

구약, 신약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의 흐름을 볼 때 변함없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도자와 백성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을 때 교회음악 역시 영적으로 충만한 찬양과 신령한 곡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영적으로 혼탁한 시기에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음악이 난무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음악사의 획을 긋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 교회가 생기고 기독교 음악도 기존 가톨릭 교회음악과 개신교 음악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 것이다. 루터를 비롯해 츠빙글리, 칼뱅도 종교개혁의 중심에서 교회음악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로 발전했다. 이들은 신학적인 교리 개혁과 더불어 교회음악의 타락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에 뜻을 같이했다.

교계의 영적 타락에 동참하고 있었던 교회음악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첫째, 라틴어 찬송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다.

둘째, 여러 성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다성선율 기법에서 단선율(모노포니)로 찬양하게 됐다. 단선율이란 한 선율로 된 음악을 말한다. 종교개혁당 시 교회음악은 르네상스 음악가를 중심으로 여러 성부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다성기법(폴리포니)의 극치를 이루는 시대로 2·3·4성부, 어떤 곡은 21성부가 독립적인 노래가 되기도 했다.

당시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 이러한 단선율 기법의 개혁적 교회음악은 교계의 혁신적인 개혁과 함께 인간의 가식과 위선, 그리고 교만 등 옛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구호를 외침으로써 교회음악이 함께 변화하도록 강조했다. 작곡가 바흐는 그의 작품의 시작과 끝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교회음악이란 교회에서 불리거나 연주되는 음악을 총칭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가 얼마만큼 영적인 측면과 음악적인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뛰어날 수 있는가 하는 판가름은 어쩌면 영적으로 충만하고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음악 지도자가 열의를 가지고 성가대를 이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음악을 전공해서 음악을 가르치기보다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인 면에서도 지식을 가지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가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의 역할이 크다는 의미다.

오늘날 교인을 포함한 한국 교회는 영적 부흥을 위해서만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성문 기도를 어구로 노래한 것이 전례음악이라고 한다면 현대적 의미의 교회음악은 이웃을 위한 사랑과 화평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어느 음악 목사님의 글이 떠오른다.

김기원(관동대 음악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