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프롤로그] 염세가 아닌 사랑으로

입력 2011-03-16 18:14


‘그것은 너무 익은 살구냄새와 비슷했다. 불탄 폐허를 걸으면서 희미하게 이 냄새를 맡으며, 한낮 무더위에 썩어가는 시체 냄새….’

일본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아포리즘 ‘대지진’의 한 문장입니다. 지진 직후 연못에 떠있는 수십 구의 이웃들. 끔찍한 현실이었을 겁니다. 근 백년이 지났지만 이 현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라쇼오몽(羅生門)’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쿠다가와. 그는 말년 기독교와 예수에 대해 깊이 들여다봤습니다. ‘예수는 비유를 말한 뒤 어째서 너희는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 혼자만의 탄성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매도하고 묵살할 무수한 이유를 발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인은 매도하고 묵살할 만한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성령, 우리는 바람과 깃발에서도 얼마간 성령을 느낀다’

오늘날 일본 문단의 대표적 상 ‘아쿠다가와상’은 그를 기념해 제정됐습니다.

일본 지진을 접하며 아쿠다가와를 비롯한 많은 일본 지식인이 왜 염세적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지 알 듯했습니다. 끊임없는 자연재해 앞에 무력해도 너무나 무력한 존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어진 삶에 머리 박고 묵묵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말 이경선 기자가 한국전쟁 고아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고(故) 다우치 지즈코(한국명 윤학자) 여사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 시고쿠에 갔다가 채 마치지도 못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통화가 안돼 한동안 마음 졸여야 했습니다.

모두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즈코의 사랑은 전쟁고아를 구원했고, 구술회고록의 김정숙 권사님은 한국전쟁 후 홀로 되어서도 사랑으로 자식 셋을 하나님의 자녀로 키웠습니다. 염세가 아닌 사랑으로 그들이 다시 설 것을 믿습니다.

전정희 종교기획부장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