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이하석·최동호, ‘극서정시’ 시집 출간 “장황한 詩 그만… 짧게, 선명하게, 여백 담았죠”

입력 2011-03-16 17:35


등단 40년에 이르는 중진 시인들이 최근 시단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소통불능의 장황하고 난삽한 서정시의 유행을 반성하고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짧고 간결한 형식의 극(極)서정시집을 나란히 출간했다.

최동호(63)의 ‘얼음 얼굴’, 이하석(63)의 ‘상응’, 조정권(62)의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가 그것. 15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세 시인들은 한결같이 “요즘 시집들은 읽는 데 매우 어렵다”며 “간결하고 함축적인 서정시 본연의 형식을 되찾아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최동호 시인은 “우리 시가 너무 기괴하고 장황해졌다”며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명징한 서정시로 시의 정도를 가보자는 뜻에서 극서정시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됐다”고 했다.

“거품 향기, 찬 면도날/출근길 얼굴/저미고 가는 바람//실핏줄 얼어, 푸른 턱/이파리 다 떨군/나뭇 가지//낙하지점, 찾지 못해/투명한/허공 깊이 박혀//눈 거품 얇게/쓴/홍시 얼굴 하나”(최동호의 ‘얼음 얼굴’ 전문)

그는 이어 “극도로 축약해 행간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트위터 시대, 디지털 시대 코드와도 맞는 방향”이라며 “이에 공감하는 원로, 중진, 젊은 시인까지 서정성을 중심으로 시의 길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하석 시인은 최근 시단의 경향을 ‘곤혹스러움’이라는 단어로 압축하면서 요즘 시들은 자칫 시인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집 한 권에 실리는 편수도 60∼70편에 달해 독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측면이 있다”며 “주제를 좀 더 집약시켜 선명히 보여줘야 하며 시집에 실리는 편수도 30∼40편 안팎으로 경량화해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30층쯤이면 구름체계와 연대하는 창구가 왜 없겠는가? 창 열어놓고 담배를 거푸 피워대는 이는 어쨌든 구름 공장에 잠입하여 하얀 직원이 되는 걸 꿈꾸겠지?”(이하석의 ‘구름’ 전문)

조정권 시인은 “요즘 시의 흐름에서 지식으로 분석되는 시들에 상애적인 피로감이 있다”면서 “이를 극복하는 형태로 엄청난 생략과 여백으로 굉장한 긴장을 줄 수 있는 한 줄 시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길게 쓸 필요가 있으면 길게 써야 하겠지만 다만 그동안 언어가 너무 혹사당하고 거칠어졌기 때문에 언어의 경제학과 함께 언어의 위생, 청결성까지도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흰 산 바위 틈에서 찾았다 쇠 깎아놓은 듯 철화(鐵花)”(조정권의 ‘빙설꽃’ 전문)

이날 배석한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극(極)’이라는 단어가 주는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시를 쓰고 읽을 필요가 있다”면서 “의미론의 하중에 지쳐 있는 한국 시단에 언어의 율동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시도”라고 평가했다. 이들 시집을 출간한 도서출판 서정시학은 상반기 중에 오세영, 유안진, 김종길 시인의 극서정시집도 펴낼 계획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