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재난 피해자의 사회적 고통

입력 2011-03-16 11:31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발톱을 세우고 배를 덮치려 하고 있다. 뱃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파도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성난 파도 저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보인다.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가나가와의 큰 파도’는 바다의 공포를 포착한 우키요에(浮世繪)다. 프랑스 화가 고흐는 이 그림을 상찬했고 드뷔시는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했다.

동물성 단백질을 생선에만 의지해온 중세 일본인들에게 바다는 생명 유지를 위한 절대 공간인 동시에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림 속 파도가 쓰나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성난 파도 앞에 무릎 꿇은 어부들의 모습이 일본 도호쿠지방을 덮친 대지진과 겹친다.

이부세 마스지(1898∼1993)의 소설 ‘검은 비’.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방사능에 피폭(被爆)된 가족의 사회적 고통과 분노를 그린 작품이다. 히로시마 피폭으로부터 5년 후 후유증으로 요양 중인 시게미쓰 부부는 조카딸 야스코를 출가시키려 애쓰지만 야스코도 피폭됐다는 소문 때문에 번번이 실패한다. 시게미쓰는 원폭 투하 전 야스코를 피난 보냈기에 야스코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야스코의 당시 일기를 혼담 상대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야스코가 피난 도중 방사성 물질을 머금은 진흙 같은 검은 비를 맞은 사실을 알게 된다. 혼담은 깨지고 야스코는 피폭으로 인한 병이 난다. 소설은 후쿠시마 원전의 피폭(被曝) 공포가 그로 인한 발병보다 사회적 후유증이 더 클 수 있음을 일러준다.

지난해 12월 17일 영국 BBC 방송의 오락퀴즈 프로그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을 모두 경험한 일본인 야마구치 쓰토무(1916∼2010)를 화제에 올렸다. “이 사람이 가장 불운한 사람인지 아니면 가장 운 좋은 사람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원폭을 두 번이나 맞은 것은 불운한 일이지만 그러고도 오래 살았으니 운이 좋은 것 아니냐’는 내용으로 출연자들의 발언과 웃음이 쏟아졌다. 방송 한 달 뒤 BBC는 “일본 국민에게 불쾌한 생각을 들게 해 죄송하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소설 ‘검은 비’의 주인공은 악화되는 조카의 병세를 보면서 “지금 만약 건너 산에 무지개가 뜬다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중얼거린다. 도호쿠 지진 피해지역에서 15일 재해 피해자의 생사가 갈린다는 72시간을 넘기고도 70대 할머니들이 잇달아 구조됐다. 살아난 것도 기적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기적이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