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13) 아내 혈소판감소증 투병 기도로 완치
입력 2011-03-16 19:22
포르투갈에서 브뤼셀의 EU 대표부로 발령이 났다. 브뤼셀에선 유럽공동체와의 미래관계를 그리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우리는 테르뷰렌 한인교회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삶을 시작했다. 성가대와 구역장 사역 등을 기쁘게 했다.
교회에서는 현지 한국 입양인들을 돌보았다. 이곳엔 6000여명의 한인 입양인이 있었는데 간혹 적응 실패로 자살하는 사례가 나왔다. 나는 이들을 위한 프랑스 성경 공부를 매주 맡았다. 오빠가 자살한 자매도 공부에 잘 나왔다.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후 한국에 지부도 만들었다. 나는 이들을 집에 초대해 한국 음식을 나누었다. 70여명이나 왔는데 정말 다양한 직업군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복음의 전파와 사랑이 필요한 형제자매였다. 교회는 주말마다 브뤼셀 번화가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교회 청소년들이 율동과 찬양으로 섬겼다.
그러다 큰 시련이 왔다. 아내의 건강 문제였다. 포르투갈에서 아내는 한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다. 이후 몸에 파란 멍이 생겼고 하혈도 했다. 아내는 혈소판 감소증을 앓고 있었다. 면역체계가 혈소판을 잡아먹는 무서운 병이었다. 한번 출혈이 되면 잘 지혈되지 않는 증상이었다. 1992년 여름, 아내는 치료차 귀국해 힘든 수술을 받았다. 몸속에서 출혈될 부분을 제거했다. 수술 중에 혈소판수치를 올리는 주사를 계속 맞아 수술 후 상처가 아무는 동안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기도 했다. 수술 후 수척해진 아내가 브뤼셀에 돌아온 후 우리는 매일 밤 손을 붙잡고 치유를 간구했다.
내 생활도 달라졌다.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아내는 서울로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교인들이 금요 철야기도회에서 중보기도를 해주었고, 병원에서의 긴 치료가 시작됐다. 병이 심각했기 때문에 하루에 스테로이드를 90알씩 먹었다. 이 때문에 아내는 누워서 잘 수도 없었고 얼굴은 둥그렇게 ‘문 페이스’가 됐다.
아내는 힘든 치료 과정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가졌고 찬송가 465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를 부르며 이겨냈다. 이후 단계별로 약을 줄여가기 시작했고 혈소판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5년여 투병의 긴 터널을 통과했던 것이다. 그동안 나라 일을 한다며 가족에게 자상하지 못했던 나를 회개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정책심의관과 국제경제국장으로 근무하며 외교정책 기획, APEC, ASEM 창설, 원자력·자원·환경 개발, OECD 가입 교섭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업무가 하도 많아 지뢰밭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후 2000년 ASEM 정상회의를 서울에 유치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국제회의장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오랜 꿈의 실현이었다.
외교부는 신앙 선배들의 발의로 중앙부처에서 직장선교회가 가장 먼저 생겼다. 매월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매주 성경공부로 직원들이 은혜를 받았다. 80년대 이후 목사님들의 설교 테이프를 모아 전 세계 공관으로 보냈다. 설교 테이프를 받은 공관원들은 이를 듣고 동료나 교포 사회에 또 돌렸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없었을 때 테이프 전송망은 기독교인 디아스포라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김장환 목사를 초청해 공관장 조찬기도회를 처음으로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목사님은 매년 이를 개최해 주시니 그 사랑에 늘 감사하고 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