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물감 풀어놓은 듯 ‘꽃구름’ 활짝…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
입력 2011-03-16 17:44
매화가 광양의 섬진강변을 수놓기 시작하자 산수유꽃도 질세라 구례의 지리산 자락을 노랗게 채색하기 시작했다. 매화가 피고나면 산수유꽃이 피는 것이 섬진강과 지리산이 오랜 세월 되풀이해온 자연의 순리였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산수유꽃이 조금씩 일찍 피더니 올해는 아예 만개 시점을 기준으로 매화를 앞지르는 역전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상이변이 꽃들의 질서마저 무너뜨린 것이다.
지리산 만복대 기슭에 위치한 구례 산동면은 산수유꽃이 피면 온 마을이 붓으로 노란 물감을 찍어 점묘화를 그린 듯하다. 산비탈과 논두렁은 물론 밭둑과 고샅에도 샛노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하다. 산수유꽃이 피는 마을은 상위마을을 비롯해 반곡마을, 계척마을, 현천마을 등 산동면 일대의 크고 작은 30여곳이다.
‘산동’이란 지명은 1000년 전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지리산 산골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산수유 묘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구례의 산동(山洞)과 중국의 산동(山東)은 한자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산수유 주산지. 19번 국도변에 위치한 계척마을의 동구에는 수령이 1000년쯤 된 산수유 시목(始木)이 살아있다. 할머니나무로 불리는 이 산수유 시목은 가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지만 해마다 3월이면 몽실몽실한 꽃을 가지마다 풍성하게 피워낸다.
산동면에서도 산수유나무가 가장 많은 곳은 만복대 아래에 위치한 상위마을.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한때 100가구가 넘는 화전민 마을을 형성했으나 한국전쟁 중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30여 가구만 남아 있다. 지리산의 험준한 산자락에 에워싸여 농사짓기가 쉽지 않았던 이곳 주민들에게 오랜 옛날부터 열매가 귀한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나무는 생계수단으로 쓰였다.
늦가을 루비색 산수유 열매가 열리면 마을 주민들은 겨우내 온 가족이 아랫목에 둘러앉아 열매의 씨와 과육을 이로 분리하는 고된 작업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산수유는 한약재 재료로 인기가 높아 전국 생산량의 67%를 차지하는 산동면의 산수유나무는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상위마을의 정자인 산유정에 오르면 노랗게 물든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복대 자락에서 흘러내린 부드러운 곡선의 다랑논과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그리고 대숲과 산수유 군락이 영락없는 풍경화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엉성한 돌담 안에는 예외 없이 산수유 고목이 군락을 이룬다.
지리산온천랜드에서 상위마을까지 계곡과 돌담을 노랗게 물들이는 산수유마을엔 슬픈 노래도 전해온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로 시작하는 ‘산동애가’가 바로 그것이다. 여순사건 때 백부전이라는 열아홉 살 처녀가 토벌대의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며 불렀다는 이 노래로 인해 산수유 꽃잎은 더욱 처절하게 아름답다.
상위마을 아래에 위치한 반곡마을의 대평교는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곳으로 사진작가들이 많이 몰리는 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에는 떡판처럼 펑퍼짐한 수천 평 넓이의 널름바위가 계곡을 뒤덮고, 산수유나무는 거울 같은 수면에 가지를 드리운 채 황홀한 봄날을 맞는다.
산수유는 신기하게도 세 번이나 꽃이 핀다. 먼저 꽃망울이 벌어지면 20여개의 샛노란 꽃잎이 돋아난다. 이후 수줍은 듯 미소 짓는 4∼5㎜ 크기의 꽃잎이 터지면서 하얀 꽃술이 드러나 왕관 모양을 만든다. 산수유를 모든 꽃이 닮고 싶어 하는 꽃 중의 꽃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수유가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견두산 자락에 위치한 현천마을. 돌담에 둘러싸인 함석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현천마을은 마을 전체가 산수유나무 고목들에 파묻힌 꽃동네다. 마을 입구의 저수지에 비친 산수유꽃의 물그림자는 데칼코마니기법의 풍경화 같다.
현천마을의 산수유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 1948년 여순사건 때 토벌대의 지시로 산수유나무를 모두 베어버렸지만 어른 허리 높이 위로 다시 무성하게 가지가 돋아나고 꽃이 피었다.
반쯤 허물어진 돌담과 발갛게 녹슨 함석지붕이 더 어울리는 산수유나무. 척박한 땅에서 더 아름답게 피는 구례의 산수유꽃은 이번 주부터 꽃망울을 활짝 터뜨려 4월 상순까지 피고지고를 거듭한다.
구례=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