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梅香에 취해 詩香에 빠지다

입력 2011-03-16 17:26


어둠이 내린 산자락

섬진 처녀는 꽃단장 하고

열차소리 놀란

수줍은 야화는 파르르 떤다

강마을엔 무심한 나룻배

길손은 思索에 잠긴다

사군자 중 매화보다 사랑받는 군자가 어디 있을까. 매화는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품성을 닮아 예로부터 시와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어디 그 뿐인가. 매화의 가녀린 꽃잎과 은은한 향은 천상의 선녀를 연상하게 한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가 불사약을 훔쳐 달 속으로 달아났던 항아(姮娥)를 매화에 비유한 이유다.

그 매화가 예년보다 보름 늦게 섬진강변을 수놓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에도 꽃을 피우는 설중매지만 유례없는 기상이변에는 저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오죽했으면 섬진강 매화를 아들과 딸로 삼은 광양 청매실농원의 홍쌍리(68) 매실명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각개화를 애달파했을까.

섬진강 매화는 광양시 다압면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섬진강변에 매화가 첫 선을 보인 때는 1917년. 홍쌍리 명인의 시아버지인 고 김오천 옹이 지금은 보호수로 지정된 청매화 몇 그루를 심었다. 그 후 홍쌍리 명인이 46년 동안 백운산 자락 돌산 기슭의 척박한 땅에 매화나무를 심고 가꿨다. 꽃과 열매가 소득으로 연결되자 이웃들이 너도나도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강 건너 하동까지 가세하면서 섬진강변이 거대한 매화꽃밭으로 변신했다.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백운산 동쪽기슭에 자리 잡은 다압면에는 매화마을이 많다.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 답동마을에서 청매실농원으로 유명한 섬진마을을 거쳐 북쪽의 염창마을에 이르기까지 20여개의 크고 작은 매화마을이 봄이 오면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 수수한 자태를 자랑한다.

경전선 철교 아래에 위치한 답동마을은 대숲과 매화가 멋스런 고즈넉한 강마을. 남해와 만나기 전 강폭을 한껏 넓힌 섬진강에는 나룻배들이 한가롭고 떠있고 무심한 오리떼는 자맥질이 한창이다. 이따금 경전선 열차가 거친 호흡과 함께 철교를 건널 때면 가녀린 꽃잎들이 놀라 파르르 떤다.

매화꽃길은 광양과 하동을 연결하는 섬진교 서단의 원동마을에서 두 갈래로 나눠진다. 861번 지방도를 따라 신기마을을 지나면 외압마을과 내압마을을 거쳐 섬진마을에 이른다. 섬진교에서 강변길을 택하면 어린 매화나무 가로수가 상춘객들을 맞는다. 청매화 백매화 홍매화가 꽃망울을 팝콘처럼 활짝 터뜨린 강변길은 섬진강에서 가장 먼저 꽃이 피는 곳.

섬진마을의 청매실농원 입구에 위치한 수월정은 조선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만년을 보내려고 세운 아담한 정자. 훗날 섬진강변을 하얗게 물들인 매화를 상상이라도 한 듯 수월정을 오른 송강 정철은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다”고 읊었다.

매화마을로도 불리는 섬진마을은 산비탈과 골짜기는 물론 마을 고샅길까지 매화나무가 지천이다. 그 중에서도 청매실농원은 3000개가 넘는 장독과 대숲이 수천그루의 매화나무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청매화 고목이 멋스런 장독대 아래 진입로는 매화나무 묘목과 봄나물 등을 파는 마을 아낙들로 작은 장터를 이룬다.

봄 햇살이 따스한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 오솔길은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문학동산 너머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인 초가집 주변의 문학동산에는 성삼문, 이병기, 윤동주, 김영랑, 정호승 등 유명 시인들의 시 30여편이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시심을 돋운다.

문학동산에서 눈길을 끄는 시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이 꽃잎들’로 시인은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피는 꽃을 보고 못 견디겠다며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에 차라리 까닭 없는 분노가 인다고 노래했다.

백운산 중턱의 전망대는 청매실농원은 물론 매화마을과 섬진강, 그리고 강 건너 하동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 강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멀리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가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섬진강 모래톱보다 하얀 시멘트 농로가 구불구불 등고선을 그리며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을 올라가는 모습도 이곳에선 한 폭의 풍경화.

영화 ‘취화선’과 드라마 ‘다모’를 촬영한 대숲은 봄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야외무대. 섬진강 봄바람이 대숲을 빗질하듯 휩쓸고 지날 때마다 어른 팔뚝 굵기의 대나무가 부딪치는 소리와 댓잎 스치는 소리가 심신을 청량하게 씻어준다. 대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기와집과 장독대는 청매실농원의 트레이드마크.

매화는 한밤에 더욱 매혹적이다. 백운산 너머로 해가 지고 섬진강의 하늘이 암청색으로 물들면 백매화가 더욱 하얗게 빛난다. 이어 어둠에 묻혔던 섬진강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달빛에 젖어 더욱 하얀 매화가 은하수가 내려앉은 듯 백운산 자락을 수놓는다. 순간 구름사이로 나타난 보름달이 매화나무 가지에 걸린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매화 그림이 이처럼 낭만적일까.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부른다. 매화의 향기가 희미해 밤이 깊어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늦게 피어 더욱 아름다운 섬진강 매화의 암향이 다사마을, 소학정마을, 고사마을, 항동마을, 죽천마을, 평천마을, 직금마을, 염창마을 등 이름조차 멋스런 섬진강 강마을을 거슬러 북으로 북으로 봄소식을 전한다.

광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