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쓰나미 대비 훈련’ 현장 가보니… “에∼엥” 사이렌 울렸지만 온가족 한가로이 바다 구경

입력 2011-03-15 19:49


“에∼엥 지진해일로 인한 훈련경보를 발령합니다. 신속히 높은 지대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민방위 기본법이 제정된 1975년 이후 처음으로 지진해일(쓰나미) 대비 훈련이 실시된 15일 오후 2시 강원도 강릉시 경포해변.

민방위본부가 훈련경보를 발령했지만 주민과 관광객들은 경보 사이렌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포해변과 솔향기 공원에서는 가족과 관광객들이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민방위 대원의 제지에도 가던 길을 계속 가거나 건물 앞에 선 채 담배를 피우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시민들의 표정과 행동에는 ‘이런 거 귀찮게 왜 하느냐’는 식의 짜증과 귀찮음이 배어났다.

경포해변을 끼고 도는 2차로 해안도로인 창해로에는 통제요원들이 군데군데 배치됐으나 차량 통행을 막지 못했다. 관광객들은 사이렌이 울린 영문조차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주차된 차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통제에 나선 민방위 대원들도 건성으로 훈련에 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자 훈련 종료 5분전인 2시15분부터 차량 통행을 막지 않았다. 주민들과의 실랑이가 부담스러워서인지 진지함이나 긴박함보다는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듯했다.

훈련 내용도 명확하지 않았다. ‘신속히 높은 지대로 대피하라’는 경고 방송만 할 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피소를 아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횟집을 운영하는 박모(45·여)씨는 “대피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대피를 한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해일이 나면 그냥 가게에 있겠다”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일본이 지난 11일 규모 9.0의 지진과 쓰나미로 수만명이 죽거나 실종된 것은 남의 일로 치부됐다. 경보 사이렌 소리는 공허한 소음에 불과했고, 성숙한 시민의식은 실종됐다.

관광객 권모(30·여·춘천시)씨는 “통제에 따라 차량에서 대기하기만 했을 뿐 평소 민방위 훈련과 다른 점을 모르겠다”며 “보여주기 식의 훈련인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동해에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할 경우 이르면 30분 만에 쓰나미가 들이닥치고, 동해안 내륙 100m까지 물에 잠길 것으로 소방방재청은 예측했다.

이에 대비해 강원도내 동해안 6개 시·군은 318.1㎞ 해변에 116개 무인 감시 시스템을 갖추고, 117개 지진해일 대피시설을 지정했다. 그러나 대피시설 대부분은 내진설계조차 안 된 학교와 모텔, 상가여서 무사히 대피를 했더라도 이후 안전을 담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수용인원도 13만6060명에 불과해 해안지역에 거주 중인 주민들만 겨우 수용할 수 있다. 관광객들은 해일을 피할 곳이 없는 셈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안이한 대응도 문제다. 2008년 지진해일 대책 시범사업 지자체로 선정된 강릉시는 그동안 시민을 대상으로 단 한 차례도 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 쓰나미 재난상황을 다룬 영화 ‘해운대’의 배경이 된 부산은 이날 쓰나미 대비 훈련에서 제외됐다. 현대자동차 등 중화학산업 시설이 밀집돼 있는 울산에서는 원전이 위치한 울주군에서만 제한적으로 쓰나미 대비훈련이 실시됐다.

한 지진해일 전문가는 “실제 상황에 대비한 시뮬레이션과 훈련이 부족해 지진과 동시에 쓰나미가 밀려올 경우 대응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강릉=정동원 기자 cd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