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12) 포르투갈서 남북 대사관 하나돼 협력

입력 2011-03-15 19:43


1989년 3월, 포르투갈 참사관으로 가게 됐다. 업무를 시작하면서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며 주님의 일을 생각하며 일할 것과 현지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기도했다. 리스본의 한인교회 식구는 강병호 선교사 가족뿐이었다. 선교사님은 현지 마약촌 사람들을 섬겼다. 교회에는 코트라 관장 가족이 나왔고 교회가 성장해 우리가 떠날 때는 4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했다.

현지 신학대학교에는 포르투갈어권 선교를 꿈꾸는 선교사 가정이 몇 명 있었다. 이분들과도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이점상 선교사는 기니비사우, 정명섭 선교사는 앙골라 등으로 선교 사역을 떠났다. 선교지를 위한 중보기도와 연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1년 6월, 주니어월드컵축구대회가 포르투갈에서 개최됐다. 한국팀은 역사적인 남북한 단일팀으로 구성됐다. 우리는 이들의 영접 준비 지시를 받았다. 파란색 한반도기를 제작하는 것을 비롯해 선수단과 기자단에게 제공할 음식 문제, 응원단 구성 등을 위해 일했다. 단일팀 영접이라 북한 대사관과도 협력했다. 북한 대사관원 2명과 우리 측 2명이 만나 실무협의를 가졌다. 리스본 시내 호텔을 예약하고 배추 확보에 돌입했다.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연일 수송했다.

조광제 대사님이 갓 부임했는데 선수단이 오기 며칠 전엔 사모님도 도착했다. 그런데 사모님이 식당을 점검하던 중 의자에서 떨어져 허리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긴급히 이점상 선교사를 모시고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또 좋은 의사를 소개받아 병원에 휠체어를 타고 갔다가 걸어 나오게 됐다. 공관원 부인들과 교포 봉사자들이 한몸이 되어 뛰어다녔다.

선수단을 위한 차량대형도 북한 측과 정했다. 그 전엔 서로가 감시하는 형국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 측 외교범퍼 041, 북한 쪽은 042번 차량이 선수단 버스 뒤로 나란히 가는 대형을 편성했다.

6월 22일 남북한 선수단은 대한항공을 타고 모두 한반도 운동복을 입고 도착했다. 밖에는 남북한 혼합 환영단이 대기했고 나는 사전협의차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선수단은 모두가 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누가 남한 대표이고 누가 북한 대표인지 구분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함께 도착한 남북한 공동대표단은 환영만찬에 참여하고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남북한은 공동으로 응원 연습을 했다. 교포들은 경기가 열리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첫 상대였던 아르헨티나에는 1대 0으로 이겼다. 남북한이 같이 응원했다. 선수들이 잘했고 우리 응원단도 힘을 냈다. 두 번째는 아일랜드. 그때 북한선수단은 스타디움 다른 쪽으로 가서 따로 응원을 하였다. 경기는 1대 0으로 거의 패색이 짙었으나 종료 직전 가까스로 골을 넣어 비겼다. 그때 골을 넣은 북한 공격수는 우리 한 여성교민이 필사적으로 울다시피 응원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주최국 포르투갈에게는 0대 1로 졌으나 준결승에 나갔고, 8강전에서는 브라질을 만나 0대 5로 패했다. 6월말 단일팀은 북한 측 항공기를 타고 돌아갔다. 포르투갈에서의 남북한 간 한달 간의 짧은 협력의 시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남북단일팀 역사는 그 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내 마음에는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남북한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에스겔서에 나오듯 두 나뭇가지가 합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