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11)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통해 새로 태어나

입력 2011-03-14 19:10


유엔 근무 3년을 마치고 1986년 봄 귀국한 나는 다시 중미과장으로 일하게 됐다.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 반포동 남서울교회에 다녔는데 홍정길 목사님을 찾아 귀국 인사를 드렸다. 홍 목사님은 우리 집이 서초동에 더 가깝다며 사랑의교회를 권했다. 사랑의교회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부터 아내와 함께 제자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부교역자와 12명이 한 조를 이루어 매주 특별성경훈련을 실시했다. 두세 번 빠지면 무조건 탈락인데 모두 열심히 참여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출세지향인 데다 냉정하며 차가운 성격이었다. 기도할 때면 나 자신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것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런 나를 훈련받으라고 권한 것은 아내였는데 훈련이 거듭될수록 나의 이기적인 면과 맞닥뜨리게 됐다. 그때마다 눈물로 회개했다.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님이 전적으로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됐다. 나처럼 차가운 사람이 예배 때마다 무슨 눈물이 그리도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12명 제자들은 서로가 보기에도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구원의 확신을 다졌고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회개하면서 내면을 열어 소통했다. 술을 마시던 이들도 나를 포함해 모두 술을 끊게 됐다.

1년 후에는 옥한흠 목사님과 훈련을 받았다. 제자훈련은 평신도를 예수님 닮아 온전케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 초점이 있었다. 사역훈련은 양성된 제자가 교역자 지도 아래 말씀을 가지고 소그룹으로 모여 다른 성도들을 섬기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나는 훈련 중에 다락방 순장으로 섬길 수 있었다. 출장도 많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출석에 지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을 기도로 감당하려고 노력했고, 제자훈련으로 거듭난 아내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당시는 유엔 에스캅(ESCAP) 정부간 고위급회의 업무를 담당하던 때였다.

그때도 유엔공업기구(UNIDO) 이사국 진출을 추진 중이었는데 태국에서 열린 총회에서 북한의 방해가 있었지만 교섭을 통해 목표를 관철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에스캅에 신탁기금을 설치해 다른 개발도상국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에스캅 사무총장은 한국의 신장되는 위치를 감안해선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차기 에스캅 총회에서 한국 외무장관이 임시총회 의장을 맡을 것을 제안해 왔다. 정부는 이를 국위에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수락했다.

수개월간 준비가 잘 됐고 장관 일행도 동남아로 떠났고 나도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날, 갑자기 태국에서 연락이 왔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유엔 비회원국인 한국 장관의 임시총회 의장을 수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는 비동맹 맹주로 발언권이 컸다. 공산권의 반대도 있었을 것이다. 난감했다. 우리는 급히 에스캅 사무총장에게 회원국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차질 없이 추진해 달라고 강력 요청했다. 나는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타러 가면서 아내에게 강력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자카르타에 도착해 우리는 에스캅 사무총장에게 연일 압력을 넣었고 인도네시아 외무성에 대해서도 원칙 고수 입장을 주장했다. 나는 호텔방에 엎드려 기도했다. 마침내 총회 개막 전날 밤 11시가 지나서 전화벨이 울렸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양보했다는 보고였다. 주님께 감사드렸다.

원칙이 이긴 것이지만 나에겐 참으로 강력한 기도 응답이었다. 나라를 세우는 것은 땀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느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