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 기도' 저자 김영봉 목사 "한국 교회, 여전히 사귐의 기도 부족하다"
입력 2011-03-14 14:47
[미션라이프] “누구는 과거에 심히 아팠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아프지 않았고, 지금도 별로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 아플 것입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삶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IVP)에서 저자 김영봉(52·와싱톤한인교회) 목사는 삶과 사랑의 본질을 아픔으로 풀어나갔다. 상처에 대한 치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위로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악이 편만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가 이 책의 더 큰 주제라는 게 김 목사의 설명이다. 저서와 관련해 최근 방한한 김 목사를 만나 고통, 기도, 목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아파야 할까. 궁금했던 책 제목부터 물었다.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는 작업입니다. 사춘기 시절 사랑은 달콤하고 받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희생을 감내하고 기다려주고, 상대방의 아픔을 보며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도 아픈 사랑”이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십자가이고, 거기엔 극대치의 아픔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랑의 아픔’을 목회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목회자가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거나 ‘내 할 일만 잘하면 된다’고 마음먹으면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우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수록 아픔은 수반됩니다. 그 아픔을 통해 치유와 회복이 이뤄지고, 소통이 됩니다. 그것은 나를 죽이는 아픔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아픔인 것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픈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목사는 ‘사귐의 기도’로도 유명하다. 10여년 전에 쓴 이 책은 ‘만사를 변화시키는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이전에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기도의 참모습이라고 소개했었다. 하지만 김 목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책에서 지적한 내용이 거의 변화되지 않은 것 같다”며 한국 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만 집착하고, 내 존재의 변화보다 내 소유의 변화에 머물고, 기도의 열심이 곧 이기심의 정도를 말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그는 “사귐의 기도는 통성 기도, 침묵 기도라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질서가 특징”이라며 “사귐의 기도가 깊어질수록 기도생활의 초점이 나보다는 하나님, 물질보다는 내 존재로 옮아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협성대 교수였던 김 목사는 6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미국연합감리교회(UMC) 소속의 이 교회에서 그가 부임하자마자 시도했던 것은 설교에 영화와 소설을 곁들인 이른바 ‘포스트모던 설교’. 2006년 ‘다빈치코드’에 이어 2007년엔 영화 ‘밀양’, 2009년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이어, 지금은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 그의 설교에 등장하고 있다. 처음엔 “거룩한 강단에 웬 영화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한 번 두 번 반복하는 동안 그런 우려는 사라졌다. 영화와 소설을 소재로 하되 철저히 성경 본문이 중심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그 전엔 교인들이 모이면 신앙 이야기를 하다가도 한국 정치나 골프 이야기로 빠졌지만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신앙이 중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던(modern) 목회가 목회자가 교인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던(post-modern) 목회는 교인들과 함께 질문하고 함께 길을 찾아가고 함께 자라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목회란 삶의 모든 영역이자 교인들과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란 게 김 목사가 내린 목회의 정의다.
다음은 김영봉 목사와의 인터뷰 전문.
-왜 사랑하는 사람은 다 아파야 하나?출판사에서 지은 제목이긴 한데 제가 책에서 얘기하려는 내용을 잘 전했다고 생각한다. 책은 상처와 치유, 악의 문제, 그리고 악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나를 다루고 있다. 편집부에서는 첫 번째 내용을 가지고 제목을 정했다.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아픈 사랑이다. 사랑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십자가다. 그것은 극대치의 아픔을 경험한 상징이다. 사춘기적인 사랑은 달콤하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사랑을 닮아갈수록 희생을 감내하고, 기꺼이 주고, 기다려주고, 상대방의 아픔을 들어준다. 우리는 참된 사랑을 모른다. 하나님 사랑을 배워갈수록 참된 사랑을 안다. 그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를 주는 것이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거나 목회하면서도 너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이의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 목회하면서도 교인들에 대해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아프지 않다.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밀어붙인다면 역시 아프지 않다.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아픔은 수반되어서 온다. 그 아픔을 통해 치유와 회복, 소통이 아울러 수반된다. 그저 나를 죽이는 아픔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아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사귐의 기도’도 쓰셨는데 기도란 무엇인가?기도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이다. 만남과 사귐은 다르다. 만남은 일회적, 피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사귐은 적어도 상당한 시간을 두고 지속되어야 한다. 사귀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다. 기도는 사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그러면 하나님 앞에 요구하지 말라는 거냐’고 한다. 진정한 사귐은 그 안에 다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귐은 깊어져간다. 요구하는 것은 기도의 일부분일 뿐이다.
-기도로 흥한 한국 교회가 기도로 망하게 됐다는 말도 있다. 각자 제멋대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기도에 대한 한국 크리스천들, 목회자들의 오해는 어떤 건가?‘사귐의 기도’에서 지적한 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 선물만 원하는 것, 사귐을 통해 내 존재가 변화기보다 내 소유의 변화에 집착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기심의 수준을 말하는 경우가 참 많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게 더 많아야 하는데 아집과 고집, 이기심이 더 많은 것은 한국 교회 대부분의 현상인 것 같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기도로 뭔가 이루었는데 오늘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이유가 기도가 사귐이 되고, 사귐이 우리의 삶을 바꾸고, 성령의 인격적 열매가 맺히고 영적 성장이 일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란 말은 들으면 벅차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기도를 통해 움직여야 하고, 내가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 책을 낸 지 벌써 10년이 다 되었는데 책에서 지적한 내용이 변화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안타깜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우선 특징이 아닌 것을 말해야겠다. 사귐의 기도를 읽고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은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 사귐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책에서 침묵기도나 묵상기도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국 교회의 기도가 너무 통성에 치우쳤기에 밸런스를 위한 것이었다. 저도 개인적으로 소리 내서, 큰소리로 기도할 때가 많다. 기도의 형식을 가지고 사귐의 기도를 한다 안한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사귐의 기도를 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평안함을 옆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를 하면서 자주 경험하는 것은 평소엔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교회도 잘 나오고 평신도를 교리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분이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기도요청을 하면서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없이 쌓아온 교리적, 습관적 신앙은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반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봐서는 신앙이 별로 깊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삶의 위기 앞에 담담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있었구나 하는 걸 짐작하게 된다.
사귐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뭔가 질서가 잡혀 있다. 좌충우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를 잡아서 해나가기에 거기서 오는 삶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생활의 초점이 나보다는 하나님, 물질보다는 내 존재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차분하다는 것과 침체되어 있다는 것은 다르다. 소위 영성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나 교회는 차분함 속에도 다이내믹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차분함 속에 유머가 있고 활기, 창조성이 있다. 사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결합이기에 하나님의 속성, 창조성, 예술성이 우리 속으로 유입돼 오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 교인 중에 예술가들이 몇 분 있다. 문학가들 사이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면 문학적인 생명은 끝났다’는 얘기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분들과 얘기 나누면서 ‘가장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결코 세속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떠날 때 창조성을 회복한다고 생각지 말라고 했다. 교리적이거 형식적인 종교에 빠지면 창조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면 창조성이 회복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매일 들을 수 있나?나는 교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조심해라.’ 목회자들이나 사역자들이 간증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가 많다. 그것은 어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다’고 해야 한다. 물론 사도 바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다. 이용규 선교사도 그런 얘길 했다. 그분의 책속에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은 10년치의 내용을 한꺼번에 모아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은 매일매일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만 읽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진도를 따라 읽는 방법이 있다.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 때 이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러면 신비로운 경험을 많이 한다. 어제 저녁까지 해답을 몰라 고민하다가 오늘 아침 말씀 읽으면서 분명한 해답을 얻는다. 폴 트루니에도 그런 말을 했다. ‘신앙생활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행동하지 않는 것, 매일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선택해가면서 가는 것이다.’ 나한테는 두 번째 방법이 더 낫다. 매일매일 설교 준비해가면서 신문 보는 중에 답이 나오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기도하지만 책과 말씀묵상, 아내와의 대화, 설교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열어놓으면 내가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어제도 그제도 인도하신 하나님을 느끼고 깨닫게 된다.
-언제 와싱톤한인교회로 갔나? 6년 전이다. 협성대 교수를 그만두고 미국인 교회서 2년간 목회를 했다. 그러다 와싱톤한인교회의 청빙을 받아 가게 됐다.
-목회라는 게 뭔가?목회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다. 영어로 이런 얘기가 있다. ‘Ministry is everything what we do.' 내가 먹고 자고 책 읽고 하는 게 다 목회다. 미니스트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인데 그러면 거기서 목회가 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게 성직이다’고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면 같이 사는 것이 목회다. 교우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구원을 때로 방주에 올라타는 것에 비유한다. 물론 그 비유가 옳지만 그 비유가 주는 오해도 있다. 신앙생활을 마치 예수 믿어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 많은 부분은 구원을 여정으로 해석한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교인들보다 너무 앞서가지 않고 한두 걸음 앞서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소대의 분대가 목적지를 향해 갈 때 향도가 길을 헤쳐나가는 것처럼 너무 앞서가지 않고 같이 어울려서 나가는 것, 구원의 여정을 함께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 목회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던시대에 맞는 포스트모던 목회는?모던(modern)적인 교회는 '나는 아는 사람이고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목회자가 가르쳤다. 그런데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엔 함께 질문하고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고향에서 제일 교육을 많이 받은 분이 목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목회자들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 지역엔 너무 많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여전히 먹히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한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전문적인 일들을 얘기해주는 격이다. 그런 권위를 내려놔야 한다. 그리고 함께 질문해가고 함께 탐색해가는 게 필요하다. 투명하게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도들이 인정하는 것은 목회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고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거면 존경을 받는다. 한국 교회를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은 많이 고령화됐다는 것이다. 20~30년 전에 활동하던 분들은 충성심으로 나오지만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20년 후엔 심각한 위기를 맞을 거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아나게 해서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가슴 설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어쩌다 교회 나와서 ‘내가 돌아올 곳은 교회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저서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와 관련해서 크리스천도 롤스로이스 같은 최고급 승용차를 타도 되는가?거기에 대해서는 단선적으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부자란 정의도 쉽지 않고.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소유에 대해 어떤 책임의식을 갖고 사느냐이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물질에 대해 축복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와 내 가정과 내 필요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하고, 그것을 하나님 뜻 위해 어떻게 사용할 건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써야 한다. 얼마 전 내 목회칼럼에도 썼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비 앞에서 기도하는 게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볼보나 벤츠가 사치품일 수 있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 수입에 비춰봤을 때 무리해서라도 고급차를 타는 경우가 많다. 그건 또 다른 면에서의 부덕함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이 차 있지 않기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치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정직한 수입을 통해 많은 수입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벤츠가 사치품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 얼마만큼 책임의식을 가지느냐, 그 책임의식을 갖고 고민하느냐, 그 고민의 결과로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크리스천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가난의 문제도 부자의 문제처럼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일관된 하나님의 관심사가 가난이다. 특히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가난이다. 그 가난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런 가난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다. 그것은 퇴치해야 할 가난이다. 내가 말하는 가난은 ‘simple life’다. 기독교인이 열심히 일하고 고액의 연봉을 받고 비즈니스를 해서 돈을 많이 받는 걸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한국에서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는 게 다행스럽다 생각했다. 전면적으로 부정한 게 아니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세금 정직하게 내고, 정직하게 노동하고, 불의하게 돈 벌지 말라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지 않나. 그런데 거기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마치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듯 ‘여기까지 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누리거나 호의호식하면 된다고 하는 점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은 우리가 가도 가도 못가는 그런 높은 기대가 배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실천 가능한 만큼만 축소시켜 놓고 ‘여기까지만 해라’라고 하는 것은 수입이 높은 한국의 상위 1~5% 사람들에겐 엄청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우리 수입의 100%를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하는데 그걸 부정하는 것처럼 됐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사실 청부론이 얘기하는 것은 철저히 청교도 경제윤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요즘 진보적인 경제학자도 나서서 ‘나눠야 한다’고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앞서가지는 못할망정 타락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성경적인 것으로 합리화시켜주고 인간의 무한욕심을 자극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건강하게 노동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수입이 늘어가면서 내가 누릴 것도 늘어나겠지만 한없이 늘어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인터뷰 진행=이태형 국민일보 i미션라이프부장 thlee@kmib.co.kr,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