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재희] 여고 동창생

입력 2011-03-13 17:36


그동안 내 생애에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몇몇 친구와는 꾸준한 사귐이 있었지만, 그들과 굳이 고등학교를 연결시키지 않았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외국과 지방에서 살아온 때문인지, 혹은 특유의 무심함 때문인지 그 시절은 묻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알게 되어 동창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카페에는 친구들의 이름과 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익숙한 이름도 있었고, 가물가물한 이름도 있었다. 앨범을 찾아내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맞혀 보며 며칠 동안 짜릿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 같다가도, 자꾸 들여다보면 이전의 모습이 기억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사진을 보다가 딸의 친한 친구가 고등학교 친구의 딸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카페에는 옛 추억과 새로운 우정이 어우러진 컬러풀한 세상이 펼쳐 있었다.

그곳에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 기쁘고 슬픈 소식들, 다양한 취미와 문화 이야기, 좋은 정보들이 많았다. 나는 친구들의 삶의 자세와 다양하고 깊은 식견과 꾸준한 자기계발이 놀라왔다. 외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발빠른 현지 이야기도 흥미를 더했다. 친구들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받는 것이 기분 좋았다.

친구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뜬 친구도 있었고, 남편과 사별한 친구도 여럿 있었다. 홀로된 친구들은 여전히 힘겨운 시간이 많겠지만, 그래도 든든히 서서 각자의 일상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대견했다. 남편을 10여년 전에 보낸 친구는 자신이 초라해 보일까봐 새 옷을 사 입고 동창 모임에 참석했단다. 그러나 이곳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도 좋은 모임이라는 것을 알고 진솔하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듯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그런 과장된 모습은 우리에게 없었다.

나는 사람을 존중하고, 따뜻하게 주위를 섬기는 친구를 가진 것이 자랑스럽다. 외로운 친구를 찾아가 벗이 되어주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맛있는 김치를 주문하는 내 친구들의 마음 씀이 고맙다. 개업을 하거나 전시를 할 때면 애써 찾아가 축하해주고, 고통스런 일에는 곁을 지키며 기도해주는 그런 친구들이 존경스럽다. 교통사고로 수년 동안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돌보고 있는 친구를 격려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약품을 자청해 배달해주는 친구들의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는다. 심지어 내가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에도 친구들은 참석해 주었고, 프로그램이 끝나는 날에는 또 다른 친구들이 찾아와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 주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또래 친구가 있어 나는 즐겁다. 힘겨운 세상을 어깨동무하고 오랫동안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따뜻한 친구들이 있어 살아가는 것이 한결 든든하고 풍요롭다.

김재희(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