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3-13 19:54
(37) 감람산 중턱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고, 결국 그렇게 된다. 그 이틀 전이다. 시간 반 남짓이면 해가 질 무렵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나가고 있었다. 제자 중 누가 감탄하며 묻는다. “선생님, 보세요! 이 성전 돌들과 건물들, 참 아름답잖습니까!” 예루살렘 돌이라 불리는 흰 돌이 석양빛에 황홀하게 물들고 있었다. 모두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마가복음 13장은 예루살렘을 놓고 경탄과 끝장, 두 가지 시각이 맞서면서 시작된다. 신학자 선배 얘기가 생각난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마가복음 세미나에서 13장으로 기말논문을 썼다고 했다. 13장은 문으로 하면 돌쩌귀 같다. 13장을 중심으로 12장까지는 긴 서론이요 뒤의 세 장은 본론인데 주제가 십자가의 수난이다. 서론이 너무 긴 것이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마가복음은 긴 서론을 가진 수난 이야기다.
13장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수난인 것은 당연하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고 그 가운데서 심장은 성전이다. 성전에 대한 얘기는 까딱 잘못하면 신성모독이 된다. 그런데 성전이 끝장난다고 말하고 있으니 수난이 없을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끝장을 내다볼 수 있는 상황이라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놓고 말했으니 뒤에 펼쳐질 상황은 뻔하다.
종교 집단이 오래되어 형성되는 헤게모니와 이권 구조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질기고 무서운 법,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 구조가 얼마나 강고하겠는가! 제사 전문가 사두개인, 율법 전문가 바리새인, 정치 권력자 헤롯당이 한 패거리가 되어 예수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나선다. 주무실 곳은 베다니다. 동쪽으로 난 문을 나와 길이 조금 내리막인데 곧 다시 오르막이 되면서 감람산으로 들어선다. 중턱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올랐을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으셨다. 13장 3절 표현으로 정확하게 읽으면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또는 예루살렘 안에서 그것들과 운명을 함께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마주 대하여 계시다가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을 대상으로 놓고 책망하신다. 예수 운동은 성전과 예루살렘에 같이 걸려 있지 않다. 성전이 끝장나고 예루살렘이 파괴돼도 예수의 길은 중단되지 않는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미래로 더 힘차게 이어질 것이다.
해질녘 감람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과 성전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모든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면서 그토록 간절하게 사모했던 하나님의 도성이다. 그러나 거기에 참된 말씀이 없고 참된 예배가 없고 참된 신앙의 삶이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다. 해가 지고 있다. 황홀하게 보이던 예루살렘이 어둠 속으로 침몰한다. 햇빛을 받지 않으니 아무것도 아니다.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건물의 아름다움은 헛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을 세 번이나 하신다. 어제 신학자 선배가 보낸 메일에 한국교회와 연관하여 이 표현이 있었다. 감람산 중턱에서 예수님은 한참 더 그렇게 앉아계셨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