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과 썰물에 삶을 물으러, 우린 떠나네… ‘항항포포’

입력 2011-03-11 18:01


항항포포/한승원/현대문학

섬으로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를 잊기 위해서든, 현재를 정리하기 위해서든.

소설가 한승원(72)씨의 신작 장편 ‘항항포포’(현대문학)는 나이든 소설가 임종산과 이십대 후반의 여자 묘연이 흑산도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항항포포(港港浦浦)는 이 땅의 모든 항구와 모든 포구를 지칭한다.

“선생님, 저 주워가지고 가세요. 저, 길을 잃어버렸어요.”(13쪽)

묘연이 던진 이 말 한마디에 동행을 허락하고 만 임종산. 그는 소설가답게 어휘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말이란 것은, 세상의 한가운데로 굴러떨어지는 모양새에 따라서 그 얼마나 야릇하게 반응하는 오묘한 것인가. 그 오묘함이 환상적인 무지갯살을 만들고 있었다.”(13쪽)

둘에게도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종산은 한때 출강하던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서로 인연을 맺었던 소연을 잊지 못해 그 사랑의 자취를 찾아 떠난 여행길이고, 미스코리아 광주 진 출신인 묘연은 강제로 추행당해 결혼한 폭력배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흑산도로 향하던 참이다.

“그 여자가 바다로 들어가 버린 뒤, 그가 바다로 나가면 바다의 모든 것이 그 여자였다. 물새들은 그 여자가 환생한 넋이고, 밀물과 썰물은 그 여자의 결 고운 심장의 고동이고 파도는 그 여자 영혼의 출렁거림이고 불어오는 바람은 그 여자의 숨결이었다.”(16쪽)

자신과 사귀는 동안 임용고시에서 번번이 낙방하고 임신과 중절을 거듭한 끝에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 소연을 떠올리는 종산에게 바다는 곧 소연이나 마찬가지다. 무책임한 자기 행동 때문에 소연이 사망한 것을 자책하며 소연의 유언에 따라 그녀와 함께 한 이야기들을 묶어 소설로 발표한 종산은 소설의 영화화가 결정된 날, 소연과의 추억 여행에 나선 것이다.

묘연에게서 소연의 모습을 발견한 종산이 묘연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여정은 종산과 소연과 묘연이 함께 하는 세 명의 여행이다. 여기에 묘연의 남편 윤창일이 집나간 아내를 찾기 위해 흑산도를 찾아가는 또 하나의 여행이 추가된다.

“묘연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자 윤창일은 삶이 바람 빠진 튜브처럼 쭈그러들었고 무력해졌다. 도시의 정글 속에서 맨몸 맨손으로 투쟁하여 성취한 모든 것들이, 묘연이 없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삶에 얼마나 대단한 부피와 무게로 작용하고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77쪽)

중간 중간 윤창일이 보낸 부하들에 의해 묘연은 정체가 탄로 날 위기를 맞지만 그들을 극적으로 따돌리며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나간다. 결국 묘연은 남편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가고 종산의 여행도 끝이 난다.

소설은 그 이듬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묘연이 종산에게 보낸 편지로 갈무리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가슴에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멱 감는 선녀의 날개 감추기이고, 아기 둘 낳은 선녀가 그것들을 안고 업고 하늘나라로 달아나기입니다. (중략)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가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어 다른 한쪽은 사공이 되어.”(368쪽)

한승원은 “오래 전부터 바다 속에 한 여자를 묻어놓고 사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 성스러움과 속됨의 길항 속에서 잃어버린 길 찾기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면서 “이 소설은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이야기이고 새 길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