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갑부 17명이 빈곤 퇴치 힘 합쳤다고?…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입력 2011-03-10 17:40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랄프 네이더/꾸리에

2005년 9월 초. 세계 최고 갑부인 워런 버핏은 TV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할퀴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의 참혹한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TV에서는 물에 떠다니는 시체들과 지붕 위에 고립돼 구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 길이 난 곳이면 어디든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재난이 벌어진 지 나흘째 되는 날, 버핏은 뉴올리언스뿐만 아니라 멕시코만을 따라 있는 작은 도시들에서도 기본적인 구호활동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주 방위군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는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 자연재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 연방긴급사태관리국(FEMA)은 허리케인이 상륙한 지 5일이나 지나서야 가장 피해가 컸던 뉴올리언스 주민들을 탈출시키는 데 필요한 버스 제공을 승인했다. 가난한 나라도 사망자들을 신속히 매장하는데, 미국 한복판 도시 하수에 며칠 째 시신이 떠다니고 시체가 썩도록 방치하다니, 그는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재해 현장으로 달려간 그는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듬해 1월 초. 버핏은 하와이 마우이 섬의 한 호텔을 통째로 빌리고 내로라하는 거부(巨富) 16명을 초대했다. CNN 방송 창업자인 테드 터너, 빌 게이츠의 부친이자 변호사인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 유명 배우에서 음료생산 거부로 거듭난 폴 뉴먼, 프라이스클럽 창시자인 솔 프라이스, 투자의 귀재인 조지 소로스, 프로그레시브 인슈어런스 창립자인 피터 루이스, 텍사스 보험 재벌인 버나드 라포포트, 식품산업의 대부인 제노 파울루치, IT 서비스 개척자인 로스 페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인 조 자메일, 초대형 서점 체인 대표인 레너드 리지오, 토크쇼의 달인 필 도나휴, 실리콘밸리의 개척자인 맥스 팔레브스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경영자인 배리 딜러, 유명한 흑인 코미디언인 빌 코스비, 존 레논의 부인이자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 등이 바로 그들이다.

버핏은 이들에게 빈곤과 부패, 지구온난화 등 전 지구적 위기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고 호소한다. 버핏을 포함한 17명의 거부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일으킨 주범으로 시장만능 자본주의와 금권정치를 지목하고, 미국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한 ‘대전환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꾸리에)는 이렇게 버핏이 거부들을 상대로 세상을 구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고령의 거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17명의 거부가 한자리에 모인 건 사실이 아니다. 저자 랄프 네이더가 지어낸 상상이다.

책에서 17명의 거부들은 빈곤을 타파하고, 시장을 떠받치는 하부경제를 강화하며 틀에 박힌 미국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등 미국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한 10가지 공익적 입법 의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네이더는 이들 부자들이 평소 기부를 실천해온 만큼 ‘실현 가능한 이상향(practical utopia)’이라고 말한다. 네이더는 거부들이 평소 했던 언행을 책 중간중간에 끼어 넣는 등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버무렸다.

“우리는 거대 권력에 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국가 시스템 전체는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경쟁과 민주적 과정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경제 역시 전면적인 개조가 절실합니다.”(32쪽)

책 속에서 거부들은 1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부시 대통령을 선택의 기로에 세우며 역사적인 ‘러시모어 산의 약속’을 이끌어 낸다.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거부들이 사회변혁을 주도하는 과정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미국 현대사를 좌우하는 정·재계 거물들을 등장시키고 묵직한 주제를 540여쪽에 걸쳐 다루면서도 저자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자본가들의 전향적인 개혁을 다루고 있어 자칫 ‘돈’을 부정하는 급진성향의 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네이더는 오히려 이런 노력이 부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자를 계속 배출할 수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사회는 결국 부자들도 돌볼 수 없다는 이치를 강조한 것이다.

1934년 레바논 출신 이민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네이더는 65년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친구를 위해 GM의 안전 불감증을 고발하는 책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를 펴내고 GM 사장으로부터 공개 사과를 받아내면서 소비자 권익 보호 운동가로 유명해졌다. 이후 정치 부패와 식품공해 등을 비판하며 미 대선에도 4번이나 출마한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꾸리에 발행인으로 이 책을 번역한 강경미씨는 “부자들의 기부활동이 활발한 미국과 달리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때리고 ‘맷값’으로 수표를 던지는 함량 미달의 재벌이 사는 우리 사회에 이 책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