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9) 당시 반기문 과장의 실력·인품에 반해

입력 2011-03-10 18:06


1980년 봄 귀국한 나는 외교부 인사계장을 맡았다. 인사 업무는 외교관 개인은 물론 가족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라 신중을 기해야 했다. 가능한 모든 요소를 고려하고 형평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당시는 정부 교체기여서 내외 환경이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퇴근 후 술자리가 잦았다. 보통 3차씩 가는 음주문화가 통상적이었고 상사가 술을 좋아하면 이래저래 술자리에 가야했다. 일도 많았고 술 때문에 퇴근 시간은 연일 늦었다. 그러면서 주일 성수는 열심히 했는데 경건함을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낙제점을 받았다.

평소 유엔 관계 업무를 하고 싶었던 나는 동기들이 과장 보직으로 나갈 때 유엔과 차석으로 전근을 자원했다. 외교부의 가장 바쁜 부서 중 하나였는데 거기엔 외교전략가인 이시영(전 유엔 대사) 국장과 반기문(현 유엔 사무총장) 과장이 있었다.

유엔과 차석으로 들어가 국제기구 업무를 시작하다 중미과장 보직을 받아 4개월 남짓 신임 과장으로 일했다. 그런데 장관이 나를 포함한 5명의 젊은 과장은 자리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고참 서기관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데 젊은 서기관들이 과장에 보임된 것은 잘못된 인사였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유엔국에서 연락이 왔다. 반기문 과장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지금도 그런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기문 과장은 실력이 탁월했고 인품도 좋아, 상사와 후배, 동료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나는 형님처럼 반 과장을 따랐다. 당시 한국은 외교 무대에서 북한과 대치 중이었다. 유엔과 비동맹회의에서 외교전이 치열했다.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공산권은 우리나라의 대표성에 도전했다. 특히 75년 비동맹회의에 북한은 가입했지만 우리나라는 가입하지 못하면서 비동맹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하며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다.

82년 봄 인도 뉴델리에서 비동맹 외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정부는 거기서 북한의 공작을 저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는 전략을 짰고 세계를 대상으로, 특히 온건 비동맹국을 설득하기 위해 치밀한 외교 교섭을 시작했다. 특사도 여러 곳으로 파송하고 수많은 친서도 발송했다. 매일 통금 30분 전 사무실을 떠나는 비상근무가 계속됐다.

중요한 외교문서는 타자기로 직접 작성했는데 오탈자 방지를 위해 오자가 나올 때마다 당시 500원의 벌금을 냈다. 외상회의가 다가오면서 반 과장이 인도 출장을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했지만 병상에서도 업무를 놓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었을까. 뉴델리 비동맹회의에서는 다수국의 지지를 받아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관철하려던 북한의 기도는 봉쇄됐고, 결국 이 조항이 삭제되면서 유연한 내용으로 변했다. 이후 비동맹 무대에서는 뉴델리 조항이 한반도 문제의 기본 입장으로 견지될 수 있었다.

반 과장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92년 APEC 담당 심의관으로 근무할 때도 외교정책 실장이었던 그를 모셨다. 94년 오사카 APEC 정상회의에서는 우리 쌀 시장 보호를 위해, 역내 자유무역 이행 추진에 ‘융통성’을 부여한다는 조항을 반영시키기까지 반 실장의 부드럽지만 탁월한 외교력이 발휘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6년 주프랑스 대사 시절에는 당시 반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에 필요한 불어권 지지 결집을 위해 뛰기도 했다. 반 사무총장이 세계 평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