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 엮인 남녀 사랑, 조상들은 어땠을까… ‘한국인의 에로스’
입력 2011-03-10 17:55
한국인의 에로스/김열규/궁리
지병을 앓던 소녀는 소낙비를 맞은 뒤 기진맥진해져 소년의 등에 업힌다. 이후 소녀와 헤어진 소년은 그녀의 안부가 무진 궁금하다. 하지만 감감무소식.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통해서다. “그 아이가 풀빛 묻은 저고리를 입혀서 묻어달랬다지 않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는 이처럼 소년과 소녀가 나눈 사랑의 절정을 간략히 처리한다.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는 러브 스토리가 ‘3인칭의 말’로 간소하게 정리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잔잔하게 처리된 결말이 되레 사랑의 비극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인의 정서를 잘 나타내준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해온 김열규(79) 서강대 명예교수가 신간 ‘한국인의 에로스’를 통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인의 남녀관계를 들여다봤다.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비롯해 신화와 설화, 동화, 그림 등에 나타난 한국인의 사랑과 관계 맺기의 방식을 분석했다. 책 제목에 ‘에로스’라는 단어를 썼지만 말초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야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에로스(Eros)가 사랑의 신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까지 의미하는 복합적 단어여서 선택했다고 출판사는 설명했다.
저자는 남녀관계와 사랑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남성과 여성을 설명할 때 빗댄 단어를 열거한다. 하늘과 땅, 안과 밖, 논과 밭, 도깨비와 귀신, 늑대와 여우, 나비와 꽃…. 망라된 단어 중 일부는 가부장 사회의 전통이 묻어나는 단어여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를 ‘대자연의 질서’라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상/하, 우세/열세 따위로 남녀 사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덮어씌워서는 안 된다. 앞에 보인 대비는 우주의 섭리고 대자연의 질서다. 우주적인 조화고 화음(和音)이다. 땅이 하늘을 떠받들고 우러르며 하늘은 풍요로운 비로 그에 응답한다. 땅이 없으면 하늘은 제구실을 잃고 만다.(중략) 남녀 동권이라면 투쟁이 그리고 경쟁이 또는 다툼이 앞장서곤 하는 일부 페미니즘의 시각에 조금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남녀는 언제나 영원한 공존이다.”(46∼47쪽)
책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결혼의 의미다. 전통혼례 절차와 의미를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중신아비를 통해 양가 자녀의 혼인이 의논되는 ‘의혼(議婚)’을 시작으로 신부가 꽃가마를 타고 시가로 떠나는 ‘신행(新行)’까지, 요즘 시대엔 가뭇없이 사라진 전통 혼례 절차를 자세하게 서술했다. 이는 결혼이 갖는 무게감이 과거 인륜대사(人倫大事)로 통할 만큼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요즘의 예식장 결혼식 문화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혼례와 장례는 ‘가장 민족적인 민속’인 만큼 이들 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에 집단의 정체성이 달려있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지금의 결혼식은 인륜대사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라며 ‘예식장 결혼 문화’를 만든 (박정희 정권 때의) ‘가정의례준칙’이 ‘폭칙(暴則)’이 됐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식장에서 치러지는 예식절차는 정체불명이고 국적 불명이다.(중략) 신랑 신부의 맞절 주고받기, 주례의 혼인선언문 낭독과 주례사 읽기가 주된 절차다. 이는 순식간에 끝을 보고 그 다음인 기념사진 찍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건 여간한 본말의 전도가 아니다.(중략) 간소화가 지나치면 결과적으로 의례는 실례(失禮)가 된다.”(133∼137쪽)
저자는 사랑에 빠졌을 때 버성기는 남녀관계에 대한 철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가 적잖은 감흥을 줬다고 적었다. ‘자리 짜기’는 물레질을 하며 실을 뽑는 여자와 그 앞에서 자리를 짜는 남자를 그린 풍속화.
저자는 “(그림에서 보듯) 뽑고 짜고 해서 얽히고 또 엮인 것이 남녀 관계”라며 “(이 책을 통해) 지금 당장의 남녀 관계가 실제로 어떠한지를 눈짓하면서 장차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만만찮은 단서를 귀띔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강대 국문학 교수, 하버드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지낸 저자는 1991년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낙향해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고 강연도 해오고 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