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9)] 지자체들 영화제 바람… 현재 70여개
입력 2011-03-10 18:06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이 몰고 온 파장은 컸습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영화제 창설’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바로 다음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출범했고, 2000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2001년에는 광주국제영화제가 뒤를 이었습니다. 현재 영화제는 전국에 70개가 넘습니다. 그중 ‘국제’를 표방한 것만도 30여개를 헤아립니다. 이처럼 많은 영화제가 생긴 것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에 그 ‘원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영화제 개최에 회의적이던 문정수 부산시장은 영화제의 ‘광팬’이 됐습니다. 그 자신이 영화 마니아가 됐고, 영화제에 관한 모든 결정은 집행부에 맡겼습니다. 부산시의 지원예산도 3억원에서 5억원으로 늘었습니다. 든든한 후견인을 만난 셈이었고, ‘자율성’의 보장은 영화제를 성공케 한 모티브가 됐습니다.
부산을 찾았던 해외 영화인과 외신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전 세계에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선정을 위해 해외에서 뛰고 있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은 더 이상 미지의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왔다’는 자기소개는 이제 자신감의 표현이 됐습니다. 그만큼 영화를 선정하고 부산으로 초청하는 일이 쉬워진 것입니다.
급격한 변화는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해외에서 초청장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해외출장이 빈번해졌습니다. 부산에 왔던 하와이국제영화제 자넷 펄슨 집행위원장이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펄슨 위원장과는 1990년 8월 인도 뉴델리 아시아영화진흥기구 창설회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그녀가 영화진흥공사를 찾아오면서 친해졌습니다.
초청장에서 펄슨 위원장은 하와이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과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일본의 원로 평론가 사토 선생은 임권택 감독과 친했고, 후쿠오카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하고도 친한 사이였는데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공교롭게 후쿠오카영화제와 개·폐막일이 겹쳐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펄슨 여사가 중재에 나섰던 것이었죠. 다행히 하와이에서 저는 사토 부부를 만나 오해를 풀었고, 그 후 매년 부산과 후쿠오카를 상호방문하면서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됐습니다.
두 번째 초청장은 96년 11월 14일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로부터 팩스로 날아왔습니다. 1월 29일부터 2월 9일까지 열리는 로테르담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영화제 심사도 해 본 경험이 없는 제가 세계 10대 영화제에 포함되는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도 아닌 심사위원장을 맡다니…. 불안했습니다. 저는 즉시 교보문고로 달려가 회의 진행에 관한 영문서적을 구입했고, ‘동의’ ‘재의’ 같은 용어와 문장을 메모했습니다. 그리고 로테르담으로 갔습니다.
사이먼 필드는 저와 막역한 ‘술친구’입니다. 93년 12월 영국현대예술원(ICA) 영화담당책임자였던 그는 한국영화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함께 처음 서울에 왔습니다. 귀국 전날 저녁에 저는 그와 박기용 감독, 건축가 김원 사장을 초대했습니다. 밤늦도록 이어진 자리에서 토니와 박기용은 진 한 병을, 사이먼과 저는 양주 두 병을 비웠습니다.
사이먼은 제1회 부산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로테르담영화제의 개막이 4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를 자신의 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초대한 것이죠. 벨기에 출신 프랑스 여성감독 샹탈 에커먼, 미국 영화평론가 파비아노 카노사, 튀니지 여성감독 무피다 트라틀리, 네덜란드 여배우 아리안 슐리터와 함께 심사하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이해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상금 1만 달러가 수여되는 ‘타이거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이후 사이먼은 매년 부산을 찾았습니다.
97년 4월에는 필립치어와 스위 랭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싱가포르영화제에, 7월에는 마에다 부부가 운영하는 또 다른 후쿠오카영화제에, 11월에는 또다시 하와이영화제에, 다음해 1월에는 말티 사하이가 주도하는 인도영화제에 각각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영화제 심사위원은 면허나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체로 유명 영화감독이나 배우, 평론가 중에서 선정하고, 영화제마다 ‘권위’ 때문에 한번 위촉했던 심사위원은 다시는 위촉하지 않는 것 또한 관례입니다. 제 경우 대부분 제1회 부산영화제에 참가했거나 평소 친했던 집행위원장들로부터 초청받은 것이죠.
부산영화제의 위상이 해마다 높아지면서 제 해외여행 횟수도 늘어나, 최근에는 매년 15∼20회 이상 심사위원이나 주요 게스트로 초청받습니다. 1년에 반 이상 해외에서 지내는 셈입니다.
첫 영화제가 끝난 후, 저는 무엇보다 정부예산을 따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영화제 소요경비도 매년 증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문화체육부부터 설득했습니다. 실무자들은 신규사업비 계상을 주저했지만 송태호 장관과 김종민 차관의 도움으로 30억원을 재정경제원에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재정경제원의 예산심의 과정에서 어렵게 7억원이 배정됐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예산이 재편성되면서 5억원으로 줄었습니다. 저는 고교 후배이며 테니스 동료인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신철식 과장에게 지원을 요청해 예산안 확정단계에서 다시 7억원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3회 영화제가 열리는 98년 7억원의 국고보조를 받게 됐습니다.
시간에 쫓기면서 정신없이 첫 영화제를 마친 우리는 즉시 자체 평가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자막, 통역, 초청 등 운영시스템은 물론, 부산국제영화제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프로그래밍 자체에도 개선작업이 병행됐습니다.
97년 10월 10∼18일 열린 제2회 영화제에선 ‘뉴커런츠’(새로운 물결) 시상제도가 수정됐고, 부산을 찾는 월드스타나 거장감독의 이름을 피프광장에 새겨놓기 위해 ‘핸드프린팅’을 마련했습니다. 개막영화 ‘차이니스 박스’를 갖고 부산에 온 웨인 왕 감독과 세계적인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남포동 야외무대에서 핸드프린팅을 했습니다.
이해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한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와 이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향기’, 그리고 베니스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일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가 모두 부산에 초청됐습니다.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기타노 다케시, 부산영화제를 통해 재조명된 김기영 감독, 그리고 ‘아편전쟁’의 씨에 진 중국 감독도 핸드프린팅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첫해와 달리 시간적 여유를 갖고 세계를 누빈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초청된 영화와 게스트의 수준이 훨씬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초청작품 수는 33개국 163편으로 31개국 169편이던 첫해와 비슷했습니다). 특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과 기타노 다케시 감독에 대한 관중의 열광은 그들로 하여금 부산을 다시 찾도록 했습니다.
코미디언이면서 감독과 제작자를 겸하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는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자주 올 테니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한번만 져주면 좋겠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고, 귀국한 후 TV에 출연할 때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10월 15일 저녁, 그와 함께 남포동에서 술을 마신 뒤 대취(大醉)한 채로 미포 바닷가에서 열린 ‘초록물고기’ 파티에 참석해 무대인사를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난해 10월 ‘씨네21’ 인터뷰에서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동호 위원장과 1년치 술을 밤새 마셨던 것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특히 부산을 통해 알려진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장윤현 감독의 ‘접속’, 김기덕 감독의 ‘악어’, 장선우 감독의 ‘나쁜영화’, 박찬욱 감독의 ‘3인조’, 김성수 감독의 ‘비트’, 전수일 감독의 ‘내 안에 우는 바람’ 등 한국영화들은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주요 영화제의 대상을 휩쓴 아시아 감독들의 영화와 함께 세계의 이목을 ‘아시아와 한국’에 불러 모았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제2회 영화제도 그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