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가 할퀸 가슴에도 새싹 돋다… 연평교회, 포격 100일 만의 첫 주일예배

입력 2011-03-09 18:18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잠언 16:9)

그 섬에 가는 길이 그랬다. 인천 앞바다는 석 달이 넘도록 연평교회로 가는 뱃길을 내주지 않았다. 평일엔 잠잠하다가도 주말이면 파도의 본성을 드러냈다. 하루 전날 밤만 해도 무사히 출항할 것이라던 예보는 당일 오전 9시면 여지없이 빗나갔다. 가방을 쌌다가 풀었다 4번의 우여곡절 끝에 ‘눈물의 연평도’ 땅을 밟았다. 지난 6일 70여명의 교인은 포격 후 100일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 밭에 사랑과 평화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연평도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5일 정오에 출항한 연평도행 코리아익스프레스는 그리 쉽게 인천대교를 훌쩍 지나 서해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배는 간간이 좌우로 흔들리며 울렁거렸다. 비위가 약한 일부 도시 사람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7∼8차례 흔들린 끝에 배는 소연평도를 지나 2시간30여분 만에 연평도 당섬에 닿았다. 선착장은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석 달 열흘 동안 피난살이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과 마중 나온 이들의 얼굴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시낭송가 공혜경(47)씨와 성악가 김철호(50)씨는 배에서 내린 뒤에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아침과 점심도 못 먹어 허기진 상태라 속이 더욱 매스꺼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처럼 빈속을 얼큰하고 구수한 된장찌개로 달랬더니 가까스로 평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속이 좀 편해지자 공씨는 빨리 시낭송 연습을 해야 한다고 교회로 가자고 재촉했다. 교회는 KT송신탑 옆 당섬 선착장이 한눈에 바라뵈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배당은 1936년에 창립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인천노회 소속이다. 예배당 오른쪽 모퉁이 돌엔 ‘1976년 9월 5일’에 완공했다고 적혀 있다. 해병대 군인교회 빼곤 연평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교회다.

연습은 1시간 30분이나 계속됐다. 음향기기 시스템이 낡아서 시낭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공씨와 김씨는 서로의 감각을 동원해 간신히 음색을 잡았다. 하지만 오디오 CD를 읽는 장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휴대용 CD플레이어가 한 대 있었지만 고장이 나서 무용지물이었다. 다행히 송중섭(45) 목사가 한 성도의 집에서 성능이 괜찮은 것으로 빌려와 어렵게 연습에 들어갔다.

공씨의 밭은기침은 해질녘이 되자 더욱 심해졌다. 아침에 주사를 맞고 기관지 확장 약까지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씨도 한숨을 쉬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 조율을 했는지조차 모를 피아노에 의지해 노래를 부를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혀서다. 그러나 동행한 반주자가 베테랑이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대전 한남대학교 출신으로 대전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송 목사는 2010년 봄 연평교회에 부임했다. 연평도가 포격을 맞은 11월 23일은 그가 영원토록 잊지 못할 날이 됐다. 당회가 인정하는 담임목사 위임예배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루 전 22일 오후 7시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해상 날씨가 좋지 않아 하루 연기된 것이다. 송 목사는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안 됩니다. 목사님, 오늘 위임식은 취소입니다.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빨리 다시 승선하십시오.”

천만다행이었다. 인천노회 소속 목회자들이 탄 배가 4∼5분 정도 늦게 도착한 게 말이다. 만약에 제 시간이나 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담임목사 위임감사예배 날 날벼락

연평도는 알려진 것처럼 한국전쟁 때도 포격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평화의 섬이었다. 그래서 이날도 날벼락 같은 공격을 받고서도 주민들은 설마 했다고 했다. 송 목사도 처음에는 ‘군이 왜 훈련을 저렇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배를 다시 인천으로 돌려보내고 부랴부랴 교회로 돌아오니 KT송신탑 바로 옆 교회 식당과 창고 옆에 큰 구덩이가 뚫린 것이었다. 예배당은 파편을 맞아 벌집처럼 변했다. 유리창은 모두 깨지고 커튼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고장이 자주 나던 온열기 2대도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집 근처에 시선이 멈췄어요. 모두들 발만 동동 굴렀지요. 교회로 와 보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더군요. 사택 주변 4가구에 포탄이 떨어졌어요. 방사로켓이라 다행히 위력이 크지 않았던 것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지요.”

상당수 가족들이 그날 밤에 어선을 타고 인천으로 떠난 상태였다. 송 목사와 정창권(57) 장로 가족 등 섬에 남은 사람들은 그날, 어두컴컴한 방공호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다. 정 장로 집 안방엔 아직도 그날 지붕을 뚫고 집안을 화마에 휩싸이게 한 탄피가 남아 있다.

본당서 첫 예배 눈물의 기도

6일 오전 10시 공씨 일행은 예배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먼저 예배당에 도착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예배 인도 봉사를 맡은 오정숙(54) 집사는 “그동안 밖에서 할 일 없이 지내느라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더 불편하고 아팠다”면서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돼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성경책을 가슴에 품은 성도들이 교회길 오르막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라왔다. 40∼50년이 넘어 보이는 측백나무도 오랜만에 성도들의 얼굴을 반갑게 맞으며 머릿결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올해 88세 정진섭 은퇴 장로는 측백나무를 바라보며 감회어린 마음으로 예배당 길을 올랐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연평우체국장을 지냈다. 현재는 아들 창권(57) 장로가 대를 이어 우체국장이 됐다. 도서지방은 별정직이라 대물림이 가능하다. 정 은퇴 장로는 “그동안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어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 밤부터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잠들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예배는 11시 정각에 시작됐다. 다같이 일어나 찬송가 1장(‘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를 땐 숙연했다. 코끝이 찡했다. 본당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한 지 3개월이 넘었지만 교인의 목소리와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도신경과 성시교독 72번(이사야 58장)을 다같이 낭독할 때도 누가 먼저 앞서거나 뒤처지는 이가 없었다. 찬송가 29장(‘성도여 다 함께’)을 부를 땐 눈앞이 자꾸 흐려지는지 너 나 할 것 없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곤 했다.

“….”

이날 대표기도를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정 장로는 목이 메어 몇 마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먼저 생각지도 못한 북한의 포격으로 100일 전에 교인이 교회를 떠났던 일을 회개했다. 정 장로는 “성도들이 육지로 피난을 떠난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서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는 또 “무자비한 포격으로 성도들이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그 모든 부귀영화도 소용이 없다는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연평교회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고마운 손길에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고 전했다.

송 목사는 이날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24)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너희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고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만사에 형통하게 된다’는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고난과 역경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요셉이 애급으로 노예로 팔려 왔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 모습을 성경은 형통하다고 기술했다고 역설했다. 송 목사는 이럴 때일수록 깨어서 기도하는 것을 멈추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또 “이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사랑하는 선지자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며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면 세상의 모든 환란과 역경,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혜경씨 자작시 ‘붉은 다짐’ 낭송

이날 송 목사의 설교는 그리 길지 않았다. 특별공연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가겠다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많은 박수를 쳐주기를 당부했다.

그녀는 연평도 공연을 위해 한복을 특별히 맞춰 입었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 빨강색 물방울 꽃무늬가 새겨진 짧은 저고리와 군청색 폭 넓은 긴 치마를 입은 모습에선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의 기운이 풍겼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이 공씨의 지론이다.

어색할 것 같은 공연이 시작됐다. 여기 사람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시낭송회였다. 이 난리 통에 무슨 한가한 시낭송회란 말인가라는 우려가 깃든 표정도 있어 보였다.

우려도 잠시, 애절하고 절절한 음악이 흐르며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정안면 시)는 목소리가 성도들의 맘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상처받은 연평도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터치를 하는 듯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유혹과 폭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의연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서 결코 화려하거나 투박하지 않으면서도 소박한 삶의 모습으로 언제 어디서나 ‘추운 것들과 함께’(이기철 시)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이어 김철호씨가 푸근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와 ‘험한 십자가’를 들려줬다. 그는 “우리 인생이 지난밤 꿈처럼 지나가는 것과 같다”면서 “짧은 인생이지만 우리의 소망 예수님의 믿음이 자라서 하늘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험한 세상을 살면서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자”고 말했다.

두 번째 시의 포장이 열리자 움츠러들었던 성도들의 어깨가 슬며시 펴지기 시작했다. 아직 커튼을 새로 걸지 못해 밖의 냉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며칠 전에 새로 설치한 두 대의 온풍기는 낭송에 방해가 될까봐 꺼놓았다. 성도들은 손과 발이 시렸지만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공씨는 연평도 포격 후 1주일 만에 쓴 ‘붉은 다짐’을 피를 토하듯이 쏟아냈다.

‘간밤에, 몇 차례 터지는 천둥소리에/혹시나 전쟁이 아닐까하고 몸 달아 TV리모콘을 더듬거렸다/천안함 사건이 있은 지 1년이 안 되어/이번엔 연평도 포격이라니…/우리에게서 점점 침작하는/이 강퍅함은 무엇인가…/꽃으로 물들여도/아깝지 않은 이 고운 세상을/붉게 물들이는 이 아픔은 왜 인가…/지금은, 굳게 닫혀진 침묵 속에 불타는 남과 북,/함께 살아야 한다고/그렇게 살아야 한다고/용광로 속 붉은 다짐으로/불이나 붙일 것이지…/돌고 돌아,/어차피 만나야 할 동포라면/지울 수 없는 아픔 묻어 버리고/더 이상 서로의 가시에 찔려/붉게 물들이지 않게 하소서!/순백의 고운 것만으로만/이 땅을 가득 물들이게 하고서!’

공씨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며 가슴팍을 파고들자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정 장로의 아내 김성자(57) 집사는 그날 안방에 날아든 포탄의 충격이 되살아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울음도 전염되는 것일까. 그녀가 떨어뜨린 한 방울의 눈물이 어느새 70여명 성도들의 눈가에도 맺히기 시작했다.

이어 공씨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모질게 살아온 삶을 그린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 시)를 암송할 땐 할머니 권사님도, 며느리 집사님도 함께 손수건을 적셨다. 김씨가 가곡 ‘비목’과 ‘선구자’를 열창해 착 가라앉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큰 박수를 받았다.

공씨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생기가 나도록 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역설했다. 팔십대 은퇴 장로와 원로 장로의 얼굴에도 빙그레한 웃음이 감돌았다.

김씨의 ‘주기도문’ 독창으로 30분 공연은 아쉬움을 남긴 채 막을 냈다. 교인들은 마지막으로 찬송가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를 합창했다. 박미경 사모의 반주에 맞춰 손님과 교인들은 마음을 모아 열창을 했다. 성가대가 따로 없었다. 70여명의 교인이 모두 성가대였다. 평화를 갈망하며 함께 부른 찬송은 이 교회 75년사에 영원히 기록될 합창이었다. 캠코더 하나 없는 조그마한 교회였기에 영상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공씨는 일행과 함께 서울 광장교회 오성춘 목사의 정성과 인터넷 카페 ‘문학공감’ 회원들의 이름으로 100만원을 봉투에 담아 헌금함에 슬며시 넣었다.

■ 공혜경씨는

1965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연극과와 건국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부터 5년 동안 ‘극단 제3무대’에서 ‘말없는 신의 자식들’ 등 다수 연극에 출연했다. 지난달 28일 KBS ‘낭독의 발견’에 출연했다. 저서로 ‘동화구연의 이론과 실제’, ‘시낭송의 이론과 실제’ 등의 책을 썼다. 지난해 4월 ‘서울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국가기념시 낭송가, 한국사회복지문학공감연구소 소장, 서울 광장교회 집사.

연평도=글 윤중식 기자·사진 김민회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