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8) 코스타리카 전보 가정교회 열어 예배

입력 2011-03-09 14:09


튀니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명령이 떨어졌다. ‘코스타리카 2등 서기관’.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였다. 공관원도 대사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교포는 10여 가족 남짓 됐다. 큰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어찌하랴. 나라의 명령인 것을.

외교관 생활은 순례자와 흡사하다. 한 곳에 부임받아 그곳 국민과 문화를 사랑하다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도착하니 이복형 대사 내외가 맞아주었다. 나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새 힘을 공급해 주셨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민주국가였다. 유엔에서도 언제나 한국의 핵심 우방이었다. 공관장은 정이 많은 분이었으나 업무에는 맹렬한 외교관이었다. 나라의 외교 목적은 반드시 관철해냈다. 미국 부호들의 파티에서 입을 꽉 다물더니 상좌를 차지하고 분위기를 주도한 당당한 모습은 늘 기억난다. 정치력이 뛰어나 주재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도 당선될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바삐 뛰어다녔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국가 위상과 외교 목적은 반드시 관철해낸다는 의지를 배웠다. 스페인어도 많이 늘었다. 마침 현지 교포 사회는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려 했다. 우리는 첫 가정예배부터 참석했다. 나는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일과 후면 타자기를 이용해 주보를 만들었다. 우리는 돌아가며 기도를 인도했고 말씀은 설교 테이프로 들었다. 적은 수였지만 사랑과 은혜가 넘쳤다.

당시 중남미 교포들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뜻을 품고 중남미로 향했으나 대부분 사업 실패나 사기를 당하고 오는 등 사연이 많았다. 태권도장으로 기반을 닦기 시작한 가정들도 있었고, 어떤 가정은 할 일이 없어 비닐 슬리퍼에 구슬 장식을 달아 가가호호 다니며 팔았다. 공관장 사모는 개인 차를 이용해 그런 부인들을 태우고 다니며 도와주곤 했다.

코스타리카 시장 개척도 주요한 업무였다. 한국 기업인들은 시장 개척을 위해 혼신을 다해 뛰었고 나 역시 뛰어다녔다. 공관에 행정 자동차가 없어 현지 자동차 딜러에 나온 포니 자동차를 개인 차로 구입해 몰고 다녔는데 한국 자동차 선전 효과도 봤다.

공관장이었던 이 대사가 미국 마이애미 총영사로 떠난 뒤 인근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발생했다. 오랜 우파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로 좌경 성향의 청년들이 봉기한 것이다. 나는 현지 언론인들과 접촉하며 상황을 서울에 보고했다. 산디니스타 정부의 성향에 비추어 앞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판단해 대책을 건의했다. 정부는 서둘러 신정부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고 이복형 주 마이애미 총영사가 이를 맡았다. 나는 그 비자 발급을 도왔다. 니카라과 신정부가 발급한 제2호 비자 발급이었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기본적으로 반미 성향 국가로 한동안 우리와 어려운 관계였다. 1979년 신임 이용훈 대사가 부임하고 현지 요인들과 만찬을 하던 날이 10월 29일이었다. 그날 오후 알고 지내던 AFP 특파원이 전화를 했다. 한국에 궁정 쿠데타가 났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 소식이었다. 차 안에서 긴급히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