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된 초록바다… 커피향 노을… 잠깬 봄, 삼천포에 빠지다

입력 2011-03-09 17:37


시인의 봄바다는 꽃밭이다. 물이 빠지면 초록색 파래가 이파리처럼 바다를 뒤덮고 해가 기울면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색 물결이 꽃잎처럼 바다를 떠다닌다. 살아서도 가난했고 죽어서도 궁핍한 시인의 고향 삼천포. 생전에 시인이 즐겨 찾았던 노산공원에서는 서럽도록 붉은 동백꽃이 눈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삼천포 봄바다를 구른다.

실안낙조와 삼천포대교로 유명한 경남 사천의 삼천포는 박재삼(1933~1997) 시인의 고향이다. 남해고속도로 사천나들목에서 3번 국도로 갈아타고 남쪽으로 줄곧 달리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삼천포가 나온다. 좋지 못한 결말이나 시행착오를 뜻하는 이 표현의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전해온다. 그 중 1965년에 개통된 부산~진주 전동열차와 관련된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동열차 3편 중 1편은 삼천포가 종착역인데 진주행 승객이 실수로 이 열차를 타고 가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삼천포까지 가버렸다는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천포 봄바다 여행은 모충공원에서 시작된다. 생김새가 거북등을 닮은 모충공원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진리 앞바다에서 최초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왜선 13척을 격파할 때 어깨를 다쳐 하룻밤 묵었던 곳. 별주부전의 전설을 품고 있는 비토섬, 토끼섬, 거북섬, 목섬 등이 파스텔톤 바다에서 그날의 승리를 반추하고 있다.

모충공원에서 삼천포대교공원을 거쳐 늑도까지 이어지는 8㎞ 길이의 실안노을길은 노을이 아름다운 도보여행 명소. 윈드서핑으로 유명한 삼천포마리나요트체험장에서 광포를 거쳐 고갯길 정상에 서면 벚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도로 변에는 짙은 커피향과 함께 노을을 감상하는 예쁜 찻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이국적 풍경을 그린다.

바닷가의 선창마을과 실안마을은 남해군의 지족마을과 더불어 원시어업의 한 형태인 죽방렴으로 유명한 곳. 죽방렴은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세며 수심이 얕은 개펄에 V자 모양으로 참나무 말뚝을 박고 대나무로 엮은 그물을 설치한 어구. 밀물 때 물고기가 들어오면 V자 끝에 설치된 원통구조물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렇게 잡힌 멸치가 그 유명한 죽방멸치로 삼천포 앞바다에는 모두 27개의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다.

삼천포에서 죽방렴 풍경이 가장 멋스런 곳은 삼천포해상관광호텔 앞바다. 저도, 마도, 둥근섬, 신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고 그 사이로 초록색 등대와 어우러진 죽방렴이 거친 물살과 씨름을 하고 있다. 이따금 갈매기 떼를 몰고 다니는 어선들이 죽방렴 사이를 달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물이 빠지면 초록색 파래가 삼천포대교를 배경으로 초록융단을 펼쳐놓은 듯하다.

“비내리는 삼천포에 부산배는 떠나간다/어린 나를 울려 놓고 떠나가는 내님이여/이제가면 오실 날짜 일년이요 이년이요/돌아와요 네에∼ 돌아와요 네에∼ 삼천포 내고향으로”

실안노을길은 삼천포대교공원 주차장에서 은방울자매의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를 만난다. 검은 오석으로 만든 노래비 앞에 서면 은방울자매의 청아하면서도 애잔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때마침 떠나가는 어선의 묵직한 뱃고동소리에 은방울자매의 목소리가 더욱 애잔해진다.

“해와 달, 별까지의/거리 말인가/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사랑하는 사람과/나의 거리도/자로 재지 못할 바엔/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로 시작하는 박재삼 시인의 시비는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를 마주보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가슴 아파하는 삼천포 아가씨에게 마음의 거리가 아득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이.

대방군영 숲은 삼천포대교 교각 옆에 위치하고 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고목 10여 그루로 이루어진 대방군영 숲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숨겨두었던 대방진굴항 상주 군인들의 훈련장이자 휴식처.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삼천포대교와 초양대교의 모습이 웅장해 해질녘에는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떠들썩한 유람선선착장과 삼천포수산시장을 지나면 박재삼문학관이 위치한 노산공원이 나온다. 그 옛날 섬이었던 노산공원은 박재삼 시인이 어릴 때 즐겨 찾던 곳이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을 때 일부러 노산공원에 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육각정에서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은 ‘노산에 와서’라는 시에서 “소시쩍 꾸중을 들은 날은/이 바다에 빠져드는 노산에 와서/갈매기 끼룩대는 소리와/물비늘이 반짝이는 것/돛단배 눈부신 것에/혼을 던지고 있었거든요”라고 술회했다.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공원의 바닷가에는 시인이 어릴 적 혼을 던지던 곳에 그의 대표작인 ‘천년의 바람’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인은 유난히 삼천포의 바다를 주제로 시를 많이 지었다.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고 화안한 꽃밭 같다고 한 ‘봄바다에서’와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고 노래한 ‘밤바다에서’가 모두 삼천포의 바다에서 쓴 시들이다.

삼천포의 바다가 노산공원을 수놓은 동백꽃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황금빛에서 주홍빛으로, 주홍빛에서 보랏빛으로 시시각각 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변한다. 보랏빛 하늘이 암청색으로 변할 무렵 삼천포대교가 색색의 불을 밝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천포 봄바다를 채색했던 그 색깔들이다.

실안(實安)의 눈이 부셔 실안(失眼)이 되는 순간이다.

사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