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7) 리비아와 수교위해 치열한 외교전
입력 2011-03-08 17:57
당시 한국 대사관은 리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리비아는 중동의 석유강국이었다. 그러나 북한과 수교 관계에 있었고 우리에겐 적대적이었다.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특히 우리 기업의 중동 진출이 시작될 무렵이라 리비아와의 관계 설정은 필수 과제였다.
수교를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우선 리비아 입국 비자 발급이 문제였고 다음엔 리비아 외교부 및 정부 관리들과의 접촉이 필요했다. 나는 주로 교섭 차 리비아를 방문했던 대사님을 모시고 다녔다.
튀니스에서 트리폴리까지 가는 비행기 편이 있기는 했지만 트리폴리 현지서 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주로 육로로 다녔다. 차로 8시간을 달려 국경을 통과하고 다시 서너 시간을 달려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국경에는 수많은 차가 검사와 통관절차를 기다리고 있어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공관장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기지를 발휘했다. 국경 수비대장을 찾아갔다. 얼른 ‘화살기도(짧은 기도)’를 드렸다.
초소대장을 보자마자 짧은 아랍어로 “브라더” 하고 끌어안으며 친한 척했다. 그리고 “남한 대사를 모시고 왔다”고 했다. 수비대장은 웃는 표정으로 반가워하며 대사를 모셔오라 했다. 그가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는 동안 통관 수속은 우리 차 기사의 재치로 빠르게 끝났다. 나는 다시 수비대장을 끌어안고 인사한 후 트리폴리로 떠났다. 돌아올 때는 역순이었다.
면담도 쉽지 않았다. 외무성에 미리 면담 요청을 했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직접 부딪치기로 했다. 비서에게 한국 대사가 왔다고 하자 장관은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리비아 사람들은 상대방 얼굴을 마주보고 “아니오” 하지 못했다.
그때 한국 기업의 진출 필요성을 역설했고 두 나라 간 관계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리비아에는 한국 건설회사의 솜씨가 좋다는 평이 많았다. 부대 막사 건설을 할 때 한국 기술자들은 한밤중이라도 군부대가 요청하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좋아했다. 우리는 군사령관도 만났고 대우건설이나 삼성건설 등의 진출도 지원했다.
그래도 수교 진전이 없자 친한 실업인이 리비아가 필요로 하는 의사, 간호사 요원 파견을 제의하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리비아 사회보건성과 접촉했다. 외무성 경제국장도 만나 설명했다. 그때 북한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보건장관을 현지로 파견해 이를 무마하려 했다. 당시는 남북한 외교전(戰) 시대였다. 걱정이 됐다.
얼마 후 리비아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전에 만났던 경제국장이었는데 차관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수교에 앞서 양국간 영사관계를 맺는 데 동의한다고 알려 주었다. 뛸 듯 기뻤다. 대사님은 총영사관을 개설하겠다고 답했다. 차관은 좋다며 축하해 주었다.
두 달 만에 총영사관 개설을 위해 유능한 참사관이 영사로 튀니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총영사관 개설이 아닌 영사관 개설만을 허용한다는 문서를 느닷없이 보내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총영사 대신 영사가 부임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2년만인 1980년 한국은 리비아와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며 중동 비동맹 외교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튀니지 등은 일명 ‘마그레브’ 지역으로 초기 기독교가 왕성했던 곳이다. 재복음화의 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최근 민주화 열풍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난민들이 넘치는 튀니지와 리비아 국경은 33년 전 바로 내가 기도하며 다녔던 곳이다. 주님의 뜻을 알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