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임도경] 고전영화 발굴, 시간이 급하다
입력 2011-03-07 18:00
“멸실 위기에 놓인 영화 자료를 찾고 보존하는 데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어떤 종류이건 영화는 영상으로 기록된 역사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의 담론과 만난다. 그 순간 과거는 현실로 이동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는 그래서 단순히 문화콘텐츠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의 고전영화 아카이브(archive·기록보관소)는 텅 빈 수준이다. 필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최근 김태용 감독은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 이만희 감독의 전설적 작품 ‘만추’(1966)를 보존된 시나리오만 가지고 리메이크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이 감독의 전작품 가운데 절반 정도만 필름이 보존되어 있다. 그의 주요작인 ‘시장’ ‘흑맥’ ‘기적’도 유실됐다.
한국영화는 역사도 짧지만, 자료보존 현실은 더 보잘것없다. 열악한 수준의 영화사에 필름보관시스템이 있을 리 없었기에 영화가 상영된 이후 필름은 거의 쓰레기 취급을 당했다.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변기까지 겪으면서 많은 자료가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에서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1919년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한 한국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34년 안종화 감독이 만든 ‘청춘의 십자로’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영화 200여편 가운데 현재 10편 정도만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는 문헌자료로만 남아있다.
영화가 자료로서 체계적으로 보관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한국필름보관소’(한국영상자료원 전신)가 출범한 이후부터이다. 그나마 1950년대부터 영화인들이 꾸준히 자료 보관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덕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전후로 영화보존율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1970년대 작품은 75% 정도이지만 1960년대 작품은 40%도 되지 않는다. 1985년 국제영화아카이브연맹의 회원국이 된 이후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본격적으로 한국영화를 찾아다니며 수집해 낸 결과가 이 정도이다.
프랑스에서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남의 나라 문화유산도 일단 가져가면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발표했지만, 정작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들은 아직도 이를 반대하고 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해외 아카이브에서 간혹 오래된 한국영화 필름을 찾아내도 열에 아홉은 반환에 응하지 않는다. 잘해야 복사본을 얻는 게 고작이다. 자료원이 소장한 1930년대 한국영화 ‘미몽(迷夢)’(1936) ‘군용열차’(1938) 등 4편도 중국 전영자료관에서 아키비스트(archivist·기록수집관리자)들이 모진 고생 끝에 겨우 복사해 온 작품이다.
아키비스트가 이런 영화를 찾는 과정은 마치 인류학자 인디애나 존스가 성전을 찾아 모험을 감행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연락을 해와 수집을 하러 가는 경우보다는 전국 각지에 문을 닫은 영화관 창고나 고물상을 뒤지는 일이 허다하다. 개집 한 귀퉁이에서 오염된 양철통에 보관된 영화필름을 찾아낸 경우도 있다. 또 소장할 만한 사람에게서 “이사하면서 다 버렸다”는 허탈한 말을 듣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문제는 이런 작업조차 적은 예산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이다. 한 해 배정된 영화 수집과 자료복원비, 장기보관을 위한 디지털화 추진비 전체가 요즘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데 드는 예산보다 적다. 또 수집한 자료가 많아지면서 제2 수장고가 절실한 현실인데, 이 또한 몇 해 동안 국회에서 정치현안에 밀려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아카이브 구축의 중요성을 아는 정책결정자가 있어야 한다. 귀중한 영화필름 자료를 찾아내는 일은 한시가 급한 작업이다. 누군가의 손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필름을 손상 전에 발굴해 보존하는 일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말로는 문화콘텐츠 강국이 되겠다고 외치면서 정작 기본이 되는 아카이브를 갖추는 데 인색한 것은 부끄러운 뒷모습이다. 지금도 영상자료의 가치를 모르는 누군가의 손에서 쓰레기로 취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고전영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