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6) 약소국 위상 높이려 가족도 외교 전선에

입력 2011-03-07 17:46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기후도 좋았다. 그러나 여름은 더웠다. 사하라 사막의 열풍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살림은 서민촌 아파트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냉장고도 없이 두 달을 지내야 했다. 동네 가게에서 우유를 사 먹고 일주일 동안 설사를 하는 것으로 튀니지 생활을 시작했다.

튀니지는 겨울에는 난방을 해야 했다. 기술자 부족으로 공관이나 대사관저 보일러가 고장이라도 나면 긴급 대처가 어려웠다. 고장난 통신장비를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썼고 또 중지된 보일러를 만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이공계 출신이 아닌 것을 한스러워했다. 시간이 가면서 미국대사관 영선반장의 도움을 받거나 유능한 현지 기술자를 찾아 문제들을 극복했다.

공관원 5인 가족 외 교포는 정부 파견 의사를 포함해 2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작은 곳에서는 끈끈한 이웃관계도 생기지만 갈등도 쉽게 생겼다. 생소한 곳에 정착하면서 외교관 가정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닥칠 수 있어 늘 조심해야 한다.

튀니지는 동양 사람이 거의 없어 집을 나설 때마다 ‘관심’을 받았다. 아내의 경우 동네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옆으로 찢어진 눈을 흉내 냈다. 동네 아이들은 어지간히 우리가 신기했었나보다. 아내는 내 염려와는 달리 개의치 않고 다녔다. 동네 아이들은 아파트 문과 계단에도 고무줄을 설치해 놓고 당황하는 우리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최근 튀니지는 재스민 혁명으로 중동 민주화의 시발점이 됐지만 70년대에도 저항의 목소리가 존재했다. 당시 부르기바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으로 큰 소요가 발생해 비상사태가 선포됐었다. 수상한 테러용의자 차량을 공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마침 큰아이가 고열이 심해 해열제를 사야 했다. 나는 무장군인들에게 통사정을 하며 바리케이드 몇 개를 통과했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 테러리스트 차량이 내가 탄 차와 같은 흰색 푸조 303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튀니지는 하루에 다섯번 모스크의 기도 신호가 나오는 이슬람국가다. 그러나 교회도 존재한다. 우리는 튀니스의 개신교국제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정부가 허용한 유일한 교회다. 교포 몇 명도 그곳에 나왔다. 결혼 전 아내는 가톨릭 교인이었다. 나는 결혼해도 당신이 좋을 대로 성당에 나가도 된다면서 아내를 설득했었다. 튀니스에서 나는 교회로, 아내는 성당으로 갔다. 하지만 부부가 떨어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나는 결국 기도했다. “주님, 우리 부부가 한 교회에 다니게 해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국적별 찬양대회를 개최했다. 한국 교포들을 주축으로 한 찬양연습이 있었다. 대회 당일에는 식당 조리사 아가씨도 함께 찬양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한국팀이 찬양을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그 아가씨를 아내로 오인했다. 그 다음 주부터 아내가 스스로 교회에 나왔다.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 중동 시장개척을 위한 손님들이 자주 들렀다. 손님은 모두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는 것이 상례였다. 한 번은 신원개발 관계자 등 손님을 위한 요리를 하다가 집사람이 감전을 당해 쓰러지기도 했다. 만삭이 된 집사람이 공무를 도우러 나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력이 미약했을 때 한국 외교관들은 가족을 포함해 모두 힘을 합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