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11) 서울 신정3동 장학회

입력 2011-03-07 17:31


우리 마을, 없이 살지만… 애들 장학금 안 거릅니다

서울 신정3동 시장길 200여m 골목에는 슈퍼마켓, 미용실, 문구점, 분식집 등 27㎡ 남짓한 작은 영세 가게와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주변 동네에 비해 유독 많다. 지난해 12월 23일 이곳 골목길 주민 50여명이 동네 주민자치센터에 모여 조촐한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1989년 12월 동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신정3동 장학회’의 21회 장학금 수여식이다.

‘작은 나눔의 기적’을 만드는 신정3동 장학회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학업을 계속하는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모금한 지 올해로 22년이 됐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 신정3동 장학회=80년대 서울시는 강서구 내 목동신시가지 개발을 추진했다. 이후 강서구에 인구가 급증하자 서울시는 88년 1월 양천구를 분리했다. 이때 주변 재개발지에서 쫓겨나온 사람들이 하나 둘 신정3동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이주민 정착단지로 형성된 이 지역은 오래된 불량 주택과 재래시장이 혼재돼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그러나 신대진(70) 장학회 회장은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고 회상했다.

“다들 무척 형편이 어려웠지. 그래도 이웃 중에는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았어. 통장 회의 때면 주민들이 ‘옆집 아버지가 쓰러져서 애들 학비를 못 낸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사는 아이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져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더라’ 하는 소식들을 전하곤 했으니까. 우리도 힘들었지만 그런 얘기들을 들으니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던 거야.”

처음에는 통장들이 조금씩 회비를 걷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주민들도 참여의 뜻을 밝혔다. 그렇게 30여명이 첫 모금을 시작했다. 초대 회장 고광태(80)씨는 1년간 돈을 모아 90년 상반기 지역 학생 20명에게 첫 장학금을 전달했다.

없는 살림이지만 더 낮은 곳을 찾아 돕겠다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았다. 상인들과 주민들은 알음알음 장학회에 찾아와 돈을 건넸다. 장학회는 지금까지 540명의 학생에게 총 1억3630만원을 지급했다.

장학회는 지난해에도 지역 고등학교 3곳에서 학교장이 추천하는 학생 9명, 지역 주민이 추천한 11명을 선발해 30만원씩 모두 6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장학회는 또 생활이 어려운 중학생 3명을 별도로 선발해 1년간 무료로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줬다.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의 사연은 딱했다. 한 학생은 사업실패로 빚을 지다 신용불량자가 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다른 학생은 실직한 아버지와 2개월 전 큰 수술을 받고 투병중인 어머니를 뒷바라지하면서도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학생, 급식비가 없으면 하루 종일 학교에서 굶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기초생활수급비조차 받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신 회장은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보도가 된다니 부끄럽다”며 “어려운 학생들을 더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나눔”=금액으로 따지면 신정3동 장학회가 주는 30만원은 다른 번듯한 장학회가 주는 돈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한푼 두푼 돈을 모은 고물상, 종일 손이 부르터가며 벽지를 바르는 도배사, 보험설계사 등 영세 자영업자와 주민들이 없는 돈을 쪼개 1년간 모은 돈이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해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모금을 잊지 않고 돈을 보탰다.

윤정용(52) 장학회 행정이사는 “기업에서 낸 큰 돈에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끼고 아껴 만든 돈”이라며 “학생들이 힘들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해 조금 힘을 보태준 것 뿐”이라고 말했다.

장학회는 사무실이 없다. 주민들 모두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회원을 모으거나 회비를 독려하지도 않는다. 가입이나 탈퇴 절차 역시 없다. 여유가 생기면 회비를 내고 힘들면 잠시 쉰다. 하지만 모두들 아이들을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똘똘 뭉쳐 그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장학금을 지급했다.

주민들이 직접 이웃 중 어려움 당한 사람을 찾아 장학회에 추천하기 때문에 주민 간 화합과 단결은 덤으로 생겼다. 주민들이 항상 이웃의 사정을 묻고 관심을 갖기 때문에 친목 모임도 다른 동네보다 훨씬 많다고 했다.

장학회는 올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을 모으는 ‘홈커밍 데이’를 계획하고 있다. 첫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벌써 30대 후반이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후배 학생들에게 귀감이 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신 회장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 마음이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며 “재산이 억만금 있는 사람만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작은 관심과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